정년퇴직 전 공노비의 모습
첫 출근 날, 긴장되는 마음으로 출근하여 인사과의 안내를 받아 근무하게 될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그날따라 사무실 내에 발령받은 사람이 많아서, 발령자 모두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앞에 앉아 계시던 두 분께서 대화를 나누시는 것을 옆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어떤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저와 같은 과로 발령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분의 인상과 말투가 조금 좋지 않았던 느낌이어서 그런지, 더 긴장되었습니다.
여기저기 인사를 다니고, 저와 그분은 함께 발령받은 과로 이동했습니다.
과 전체가 모여서 인사를 나눈 후, 과장님께서 어떤 업무를 담당할지 알려주셨는데, 새로 같이 오신 그분(사무관)과 함께 파트너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외적인 첫인상으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25년간의 인생에서 터득한 직감이 본능적으로 발동했습니다.
'하 망했다'
각자 인수인계를 받고 나서, 그분께서 업무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하자고 하셨습니다.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하는데 말을 좀 심하게 더듬으시더라고요. 심지어 그분의 심한 사투리와, 공무원 업무에 대한 제 무지함이 더해져서,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대강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퇴직이 2년 정도 남으신 아버지 벌이었습니다. 그분의 아들과 나이가 같았고, 심지어 같은 학교, 같은 과였습니다;; 그분 아들께서 3수를 해서 2년 후배긴 했습니다. 전혀 모르는 친구여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분의 신상파악은 어느 정도 했는데, 업무 관련해서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하자는 건지, 잘 정리가 되진 않았습니다. 알아들은 말을 대충 정리하자면, '공무원 업무 다 거기서 거기다', '여긴 그렇게 일도 없을 것이다' '모르는 것 있으면 물어봐라'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업무가 별거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느낌이었는데 신뢰가 가지 않았습니다.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습니다. 며칠 같이 일해보니, 그분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단 딴지 걸고 보기', '띄어쓰기 검사' 두 가지였습니다. 매일 같이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ㅇㅇ씨 일로 잠깐 와 봐, 이게 맞아? 아닌 것 같은데?'
뭐든 기본적으로 제가 하는 일 모두에 딴지를 걸었습니다. 그 지적이 근거가 있는 것이면 모르겠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그저 제가 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닌 것 같다고 딴지를 겁니다. 사소한 부분부터 항상 증명을 해야 했고, 아무리 명확한 근거를 가져다주어도 '아닌 거 같은데...' 하다가 잠깐 밖에 나갔다 오더니 '아닌 거 같은데.. 그냥 하자~' 이런 식이었습니다.
어쩌다 한 번 본인의 의견이 맞을 때면, 하루 종일 일하고 있는데 옆에 와서 잔소리를 합니다.
띄어쓰기 지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나마 그분께서 자부심을 가지고 지적하던 게, 공문이나 보고서의 맞춤법과 띄어쓰기였습니다. 그게 틀렸으면 본인이 그냥 고쳐서 처리하면 되는데, 항상 일하는 사람 불러다가 세워놓고 큰 소리로 지적했습니다.
그걸 보던 옆과 선배가 뭘 그렇게 잘못하길래 맨날 혼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말하니, 공무원 생활 처음부터 고생이 많다고, 차라리 안 좋은 것은 일찍 겪어보는 것이 좋다며 격려해 줬습니다.
한 번은, 본인이 지적했던 맞춤법이 틀린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맞춤법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니, 밖에 나갔다 오더군요. 와서 하는 말이 '그래도 보고서에 관용적으로 이렇게 쓰니까, 내가 말한 대로 써야 한다'라고 하더군요.
더 화가 났던 건, 다른 주무관님들이 올린 공문은 보지도 않고 결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주무관님들이 올려서 결재된 공문을 보면, 제가 했었다면 지적했을 것들이 수없이 많았는데도 말이죠.
하루는, 정말 하루 종일 옆에 와서 뭐라고 하길래 너무 화가 나서, 아무 대꾸하지 않고 정색한 채, 그분의 눈을 계속 노려봤습니다. 그분이 제 표정을 읽었는지, 말하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정적과 함께 5초가 지났을까요? 뭔가 그분이 깨갱하는 느낌이 들었고, 눈을 피해서 밖으로 나가시더라고요. 기싸움에서 이긴 겁니다. 그때부터 확연히, 지적질이 줄어들었습니다. 역시 사회에서 사람이 너무 물러 보이면 고생한다는 게 맞는 말 같았습니다. 대들 때는 한 번 대들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과장님도 그분이 답답했는지, 언젠가부터 그냥 저에게 바로 일을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과장님이 제게 일을 시키면 제가 그분께 다시 가서 지시사항을 전달하며 일을 했습니다. 처음엔 좀 불쾌한 기색을 내시더니, 점점 그냥 아무 일에도 손대지 않고 조용히 지내셨습니다. 언젠가부터는 퇴직 후에 일 할 거리를 찾으셨는지, 그냥 공부만 하셨습니다.
몇 년을 일해보고 나니, 그 당시 그분이 이해가 가기도 했습니다. 그분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 말이죠. 30년간 해 온 일이 그것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공무원이 더 고생하고 적극적으로 일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없고, 어쨌든 일은 해야겠기에 본인이 아는 선에서 사소한 부분에만 신경을 쓰게 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어느 순간 깨달으시고 놓아 버리신 것이겠죠.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나도 언젠가는 이 분처럼 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비참한 느낌이 들면서도, 나이 들어서 이렇게 맘 편히 돈 벌 수 있는 데가 어디 있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퇴직하실 즈음에는 그래도 친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절대 나쁘신 분은 아니셨으니깐요. 퇴직하실 때 송별회도 챙겨드렸고, 퇴직하시고도 종종 뵙기도 했습니다.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