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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nobby Oct 10. 2024

공노비식 페이퍼리스 보고 시스템

공무원의 종이없는 보고 시스템

"업무효율성 향상과 친환경적 사무실 환경을 위해서, 앞으로는 종이 없이 태블릿으로 보고해야 합니다."


어느 월요일 아침, 과 회의에서 과장님이 공지한 말입니다.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항상 별 쓰잘데기 없는 자료 뽑느라 종이를 낭비하면서, 나무에게 진심으로 미안했었거든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아이패드를 활용해서 일을 효율적으로 해보려던 참이었어서, 정말 기대가 되었습니다. 


과장급 이상 공무원에게 종이 없는 보고를 위한 태블릿이 지급되었습니다. 사실 완벽한 종이없는 보고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직원 모두 1인 1태블릿이 있어야 했겠지만, 그정도는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습니다. 주무관과 사무관은 메일로 자료를 주고받고, 과장급 이상에게는 태블릿에 자료를 담아 주면 거기서 검토하면 되니깐요.


공무원의 보고서는 경중에 따라, 주무관이나 사무관이 초안을 작성하고, 과장과 국장에게 보고합니다. 그 윗선까지 보고해야하는 사안이라면 과장이나 국장이 윗선에 직접 보고합니다. 그러므로 많으면 '주무관-사무관-과장-국장-윗선' 4단계의 보고 과정 거쳐야 했습니다. 종이 없는 보고시스템이 도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4단계를 거쳐야하는 보고 건이 있었습니다.


1단계(주무관->사무관) : 저의 기대는 처음부터 어그러졌습니다. 사실 이건 저의 과도한 욕심이었을 겁니다. 제가 작성한 보고서 초안을 사무관이 컴퓨터 파일로만 검토하기를 바란겁니다. 물론 '종이없는 보고' 시행 이전에도 30~40대 사무관들은 보통 컴퓨터로 받아서 검토했습니다. 근데 그당시 제 파트너 사무관은 그렇지 못했죠. 그냥 뽑아서 보는게 편하다고 하시기에, 종이로 뽑아서 사무관에거 검토를 요청했습니다. 이것저것 고치면서 2장의 종이가 소비되었습니다. 뭐... 여기까지도 그러려니 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2단계(사무관->과장) : 과장님도 태블릿을 쓰는 것이 익숙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과장님이 태블릿을 주며, 자료를 담아 달라고 하시기에 태블릿으로 자료를 옮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막히더라구요. 보안상 사무실에서 작성한 자료를 외부로 전송하는 것 자체가 번거로운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울고있는 나무를 위해서, 태블릿에 과장님 상용메일 앱을 깔고 자료를 보냈습니다. 태블릿으로 자료를 좀 보시더니, 뭔가 펜으로 수정을 하고 싶은데 태블릿에 수정하는게 좀 어색하셨나봅니다.


 '그냥 한장 좀 뽑아 와주세요..' 


결국 이 단계에서 사무관과 과장은 둘다 종이보고서를 보면서 검토를 했고, 이 과정에서도 수정작업을 거쳐 4장의 종이가 소비었습니다. 나무에게 점점 미안해졌습니다.


3단계(과장->국장) : 그 당시 국장님은 그래도 좀 열려있던 분이었습니다. 국장님은 아이돌 노래를 자주 들었었고, 항상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블릿을 사용하는 것을 어려워 하셨습니다. 그래도 이 단계에서는 제가 가지고 있던 아이패드를 드려서, 국과장님, 사무관님 세 분 다 태블릿을 가지고 논의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국장님 방에서 저를 호출하더라구요. 태블릿에 펜슬로 뭔가를 쓸려고 하는데 잘 안되셨나봅니다. 살펴보니 아이패드나 갤럭시탭이 아닌 저가형 태블릿이어서 그런지 버벅임도 있고 펜슬 감도도 이상하더라구요. 결국 종이로 다시 뽑아서 드렸습니다. 6장의 종이가 소비되었습니다.


4단계(국장->윗선) : '마지막 보고할 때 쓰이는 종이 1장을 줄이기위해 이 고생을 했나...' 생각했습니다. 국장님이 직접 윗선에 보고를 하러가시게 되었습니다. 국장님의 태블릿이 이상해서 그냥 제 아이패드에 자료를 담아서 드렸습니다. 윗선에 보고하는 자료는 비서실에 메일을 보내놓고, 그곳에서 태블에 담아서 주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렇게 국장님이 아이패드를 가지고, 보고를 하러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잠깐 나갔다가 바로 들어오시더니 그러시더군요. 


'ㅇㅇ씨, 혹시 모르니까 한 장 뽑아 줘'


결국 야심차게 도입된 종이없는 보고시스템은 단 한장의 종이도 절약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주일은 지났을까요? 주변 사람들 그 누구도 태블릿으로 보고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공무원 직장 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의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단순한 선언을 넘어서, 오랜기간을 두고 지속적인 관심과 투자를 통해 그 안에 있는 사람과 환경이 바뀌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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