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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nobby Oct 03. 2024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인 직업 '공노비'

공무원의 창의적인 보고서


"공무원은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인 직업이야"


입사 후 3개월 정도 지났을 때, 제 멘토로 지정되었던 사무관님과 같이 야근을 하며 들었던 말입니다.


동기 모임에 가려고 퇴근하려는 찰나에, 멘토 사무관님이 저희 과로 급하게 오시더니, 어떤 자료를 오늘까지 제출해야 하는데 우리 과에서 내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저기 저 위로 보고되어야 하는 자료인데, 과장님은 출장, 담당 사무관은 거의 헥토파스칼퇴를 한 후여서 과 내에서 작성할 사람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요청을 받은 적이 없기에, 그런 자료를 내야 했었는지 당연히 몰랐었습니다.


그래서 퇴근한 담당 사무관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 그냥 '아 그런 게 있었어? 대충해서 내줘'이러고 끊으셨습니다.


어떤 유명무실한 협의체의 한 달간 실적과 향후 계획을 1장짜리 보고서로 만들어서 내야 했습니다. 과 내에서도 별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던 협의체였고, 실질적으로 협의체가 한 달 동안 한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도저히 쓸 말이 없어서 담당 사무관에게 다시 전화해서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할까요' 했더니, '아 뭐 없는걸 자꾸 내라고 하냐' 이러면서 투덜투덜하시더니 또 다시 '그냥 대충해서 내줘~'이러고 끊으셨습니다.


멘토 사무관님은 시간이 없다며 '한 시간 안에 제출 해달라'라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쓸 거리가 없었습니다. 이것저것 끄적이면서 고민하다가 도저히 1장을 채울 수 없어서, 한 1/3 정도만 채우고 멘토 사무관님께 들고 갔습니다.


"사무관님.. 죄송한데 정말 실적이 하나도 없어요.. 아무런 계획도 없고요.. 1장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르겠어요."


멘토 사무관님은 자료를 보더니, '내가 다른 과 자료까지 만들어서 제출해야 하냐'라며, 한숨을 한번 쉬고 말했습니다.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쓰는 게 공무원 일이야."


대체 뭔 소리지 싶었습니다. '그럼 없는걸 거짓말이라도 해서 지어내라는 건가'하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더니 몇 가지를 물어보시더라고요.


멘토 사무관: 협의체 관련해서 담당 사무관님이랑 의논한 적은 있지? 몇 번 했어?


: 한두 번 정도..? 그냥 별거 없이 정말 이야기만 나눴습니다.


멘토 사무관: 이거 저번에 개최 예정이라고 잠깐 본 것 같은데, 왜 안 했어?


: 그냥 자체적으로 검토만 했던 거고, ㅇㅇ행사 준비하다가 흐지부지되어서 아예 시작도 안 했었습니다.


멘토 사무관: 그때 어디 어디랑 무슨 주제로 하려고 했어?


: 맨날 하던 곳인 ㅇㅇㅇ랑 해서 몇 개 기관이랑 하려고 했을 거고.. 주제는 안 정했었습니다.


멘토 사무관: 그럼 지금 담당 사무관한테 연락해서 어디랑 뭐로 할 생각이었었는지 물어봐~


: 넵 잠시만요


멘토 사무관: 향후 계획은 더 없어??


: 제 생각엔.. 저번에 취소된 계획 다시 추진하는 거 정도..? 근데 아예 구체적인 의논도 안 했습니다.


멘토 사무관: 뭐 어쨌든 할 거긴 하잖아? 다음 주에 과장님 사무관님한테 어떻게 할지 물어보고 추진해 봐


: 넵 알겠습니다


보고서 쓰시는 멘토 사무관님 옆에 앉아서, 3분 정도 흘렀을까요?  빼곡한 1장짜리 보고서가 완성되었습니다. 대충 흘겨보면 대단한 실적과 계획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저와 담당 사무관의 의미 없었던 대화가 "협의체 운영 관련 논의 2회"로, 방금 담당 사무관과 전화해서 물어봐서 즉석에서 나왔었던 '취소된 협의체의 주제와 참여 예정 기관 등'이 아주 있어 보이게 쓰였고, 그럴듯한 취소 사유까지 들어가 있었습니다. 향후 계획에도 다음 주에 '검토 예정', 다음 달 '개최 추진'으로 들어갔습니다.


 '논의', '검토', '예정', '추진'이라는 마법의 단어가 보고서를 완벽하게 채웠습니다. 실적과 계획이 없는 건 실질적으로 똑같았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매우 풍부해졌고, 단 하나의 거짓도 없었습니다. 보고서를 보고 감탄하던 저의 표정을 보고 조금은 뿌듯한 표정으로, 멘토 사무관님이 장난스레 말씀하셨습니다.


“공무원은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인 직업이야.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야 하거든”


입사할 때부터 주변 분들로부터 '일을 배워라'라고 귀에 딱지가 나도록 들었는데, 처음으로 '아 이게 내가 배워야 할 일이구나'라는 걸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뭔가 위로 올라가는 보고서를 쓴다는 것 자체가 내가 계속해야 할 일이고, 잘 해서 인정받아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마냥 놀라웠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점 이런 일에 익숙해졌습니다. 보고서를 잘 쓴다며, 나름 회사에서 인정도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멘토 사무관님께 배운대로,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별거 아닌 것도 대단한 것처럼 보고서를 써갔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알맹이는 없고 껍질만 가득한 자료를 보며 점점 제가 하는 일이 한심해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을 30년을 넘게 더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점점 마음 속 깊이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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