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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 May 05. 2018

기업의 탄생 [10. 현대상선]

궁여지책으로 설립한 해운회사

1972년 현대중공업을 설립하여 조선업에 진출한 정주영 회장은 수주한 선박들을 성공적으로 제작하며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설립한 현대중공업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1973년 4차 중동전쟁이 끝난 이후, OPEC의 아랍권 국가인 리비아, 이라크, 이란과 이집트, 시리아, 튀니지가 손잡고 석유 수출을 줄이는 동시에 원유 가격을 인상한 것이다. 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아랍권 국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한 보복 조치였다.

훗날 오일쇼크라고 불리는 이 조치로 인해 원유 값이 폭등하고, 전 세계의 경기가 얼어붙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현대중공업으로부터 유조선을 구매하기로 한 회사들은 불황을 이유로 구매를 취소했다. 결국 3척의 배가 주인을 찾지 못했는데, 이는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현대중공업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주인 잃은 3척의 유조선이 울산 앞바다에 떠 있는 것을 본 정주영 회장은 차라리 저 배들을 활용하여 사업을 해 보기로 했다. 배가 팔리길 하릴없이 기다리는 것보다는 해운회사를 설립하여 돈을 버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곧 아세아상선이라는 이름의 해운회사를 설립하여 원유운반사업에 뛰어들었다. 

설립된 아세아상선의 목표는 대한석유공사의 원유 수송권을 따내는 것이었지만, 그 당시 원유수송은 외국의 선박회사들이 도맡았기에 원유수송의 경험이 없는 아세아상선이 입찰을 따내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대한석유공사의 원유 수송권은 아세아상선에 돌아갔다. 달러가 부족했던 정부가 국내 기업인 아세아상선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덕분에 아세아상선은 원유운반사업에 성공적으로 진출 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회사는 훗날 현대상선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오늘날 현대상선은 시가총액 1조원이 넘는 해운회사로 성장하였는데, 판매가 취소되어 고민이었던 유조선이 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셈이다.


[참고 기사] 바닷길 주름잡는 쌍끌이 한국호(2009.03.11), 정혁준,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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