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그 익숙함과의 헤어짐은 상실이었다.

세월이 쌓여도 작별은 언제나 아프다.

by Sinkmunt

저만치 백사장이 뻔히 보이는데 밀물에 가속이 붙어

온 힘을 다해 애써도 외로움이란 갯벌에 푹 빠져서

옴짝달싹 하지 못했던 삼월의 하순이었다.

베르테르의 편지도 뜯지 않았는데

'하지만 네가 날 길들인다면 우린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거야.

내가 있어 넌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될 거고,

네게 있어 난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되겠지.'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말한 '사랑이란 소유가 아니라 길들여지는 것'이라는 이야기처럼 그게 꼭 애정이 아니어도 우정이든 동료애이든 가족이든 익숙해진 누군가와의 헤어짐은 상실이었다.


이성으로는 모든 게 이해가 되어도 상황이 달라졌다며 참 멋없게 떠나는 그녀를 보며 모처럼 감정이 요동쳤다.

매너 있게 잘 헤어지는 것도 쉽지 않게 시절인연이 되어 한때나마 서로에게 의지가 되던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일 텐데...

세월을 쌓았다고 대단한 면역력을 지닌 게 아니었다. 부정부터 분노, 타협, 우울을 거쳐 수용에 이르는 슬픔의 단계 이론이 말하는 전 과정을 압축해 10여 일 조금 지나 속성으로 통과했다. 날아가는 새는

뒤돌아 보지 않는다 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울까?


분노와 우울 사이 잔뜩 흐린 마음이었을 때

온 나라가 의성에서 영덕까지 번진 산불로 근심에 빠져있었다.

상상도 할 수 없던 그 끔찍했던 성난 재앙은 끝났지만 숱한 상처는 여전히 남아 불에 타다만 한쪽 가지에 노란 산수유꽃이 애처롭게 피어나 있었다.

익숙해진 만큼 처음으로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린다.

알코올 중독도 니코틴 중독도 아닌데 정이란 것도 쉽게 훌훌 털어버리는 게 쉽지 않았다.

그녀가 떠날 때 속은 편치 않았지만 여러모로 잘 되어

축하도 해주고 끝으로 저녁이라도 사주고 보내고 픈

작은 소망마저 부담이었나 보다.


99일의 즐거웠던 나날이 마지막 하루의 실망으로 모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중년이 되어 오랜만에 겪은 독감에 끊임없이 나오던 기침벚꽃 눈부시게 피기 시작하자 비로소 멈추었다. 전화, 드라이브, 카페 그리고 캠퍼스 등 에서 같이 했던 시간의 공백이 낯설기만 했다.


나이테가 늘수록 대화에 티티카카가 잘 되는 누군가를 만나기도 쉽지 않다. 시간의 물결에 숱하게 깎여서는 성격이 둥글게 둥글게 바뀔 듯해도 이십 대 때의 나와 큰 차이가 없다.

그만큼 썸 타던 MZ 세대 헤어지듯 초 스피드로

적응할 수 없었다. 생각만 쿨했다.


청소년기와 이십 대 중반까지 데미안, 싯다르타, 지와 사랑 같은 헷세의 서정적인 작품들과 바다로 간 목마, 풀잎처럼 눕다, 남자의 향기, 국화꽃 당신 같은 소설을 읽었었다.


뒤늦은 사춘기의 끝 무렵에는 라스트콘서트나 러브스토리 같은 애잔하면서도 새드 엔딩인 영화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취업 공부를 한창 해야 될 대학 졸업반 그 봄날까지 박범신의 풀잎처럼 눕다를 밤새 다 읽었었다.

그 이후로는 뒤끝이 못내 쓸쓸한 소설은 거의 읽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자꾸 소설과 드라마에 나오는 첫 만남과 헤어짐을 상상하곤 했다. 그 어느 시절에도 파리의 연인 속 박신양이 아니었고

그 파릇파릇한 이십 대의 여자 친구도 풀잎처럼 눕다에 은지와 조금이라도 닮은 구석은 없었다.

어떤 작별도 괜찮다 말은 하지만 속 쓰리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적지 않은 생에서 처음으로 공허함이 밀려왔다.


어느새 철쭉과 영산홍이 피어났다. 그리움이란 평생 한번 짙게 피어났던 꽃이였나 보다.

한주가 지나고 어느새 사월도 반이나 지났다.

첫 구절을 써놓고 한 줄 한 줄 적는 동안 목련도, 개나리도, 진달래도 벚꽃도 연이어 피어났다.

목련 떨어진 자리를 벚꽃이 채우고 벚꽃 잎이

함박눈처럼 날리는 순간에 라일락은 새 순을 틔우고 그렇게 강렬했던 그 쓸쓸함마저 때아닌

세찬 바람결에 흩어지고 있었다.


소설 밖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 이별의 아쉬움이 가끔이라도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숱한 나날을 메마르게 보내는 것보단,

모든 만남에 반드시 작별이 있는데도 영원할 것처럼 사람들은 생각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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