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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GA PEOPLE Jun 07. 2018

수련일지를 쓰고 싶었으나..

오늘은 꼭 수련일지를 쓰고 싶었으나 나는 이미 취했고, 졸리다..

오늘은 꼭 수련일지를 쓰고 싶었으나 나는 이미 취했고, 졸리다.. 으아함.. 그래도 뭔가 쓰고 싶다. 이걸 작가 본능이라고 할 수 있을지.. 그냥 술주정일지.. 내일이 되면 이런글 따위 지워버릴지도 모른다. 최대한 일기의 방식을 옮겨보고 싶다. 보여지는 글과 보여지지 않는 글 사이의 거리를 좁혀나가고 싶다. 그리거나 찍거나 하는 행위보다 글쓰는 것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서 이젠 좀 많이 거침없이 써내려가고 싶다. 

여튼, 한주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달력을 보고 이번주는 3번을 갈지 4번을 갈지.. 혹은 5번을 갈지를 정하는 것이다. 요가수련 말이다. 어릴때는 무모하고 거침없이 전력질주 하는 성격탓에 시간상으로 맞춰지기만 한다면 별다른 큰 고민없이 '최대한 많이'라 정해졌지만 이젠 앞뒤전후 스스로의 스케쥴상 컨디션까지 고려하며 실현가능한 계획을 세우느라 애를 먹는다. 이렇게 애를 쓰는 와중에서도 계획은 늘 높은 이상향을 가리키고, 그 계획이 실제로 옮겨진적은 그렇게 많지 않다. 컨디션이 무너지는 주는 2번도 겨우겨우 가기도 하니까. 


오늘은 드디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러닝책을 다 읽었다. 이야기는 갑작스레 러닝의 순간으로 포커스가 맞춰져 실제 상황을 중계하는 듯한 내용들이 많았다. 그런 글을 보고 있으니 나의 수련 상태의 심리상황과 별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나는 요즘 수련가서 늘 엄청난 일들을 겪곤 한다. 일단 설명하자면 레드 클래스(구령수업)와 셀프 수련은 느낌자체가 매우 다르다. 금요일은 레드클래스인데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동작을 진행하다보니 각각의 아사나에 대한 집중의 상태보다 전체적인 큰 흐름을 페이스에 맞게 조절하는게 더 큰 포인트가 된다. 그래서 마음도 다르다. 마음을 다잡고 중도에 절대 포기하고 싶단 생각만 하지말자가 제일 큰 목적이 된다. 하다보면 어찌저찌 뭔가 다 하고 있긴 하지만 몇번 정신적 고비가 오기도 한다. 정말 힘든날은 이런것도 수련이라 말할 수 있을지,이건 자학이지 않을까란 생각도 한다. 

셀프수련은 그날 그날의 포부가 늘 다르다. 한두어달 쯤 된거 같은데 사실 아직도 내가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감이 크게 안잡힌다.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분명 나아지는 건가 싶은 의구심을 항상 등에 업고 서울숲으로 향한다.(저는 잘하고 있는 걸까요?) 어느날은 몸이 가볍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날은 수련하고나서도 몸이 천근만근이다. 땀을 한바가지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부어서 그저 모든게 다 무거워 죽겠다. 운동이란 뭘까, 육체적 움직임이란 내게 얼마나 큰 혜택을 가져다주는 걸까에 대한 계산을 해본다. 내가 오며가며 쏟아낸 시간과 그 값어치를 충분히 해내고 있는걸까, '단지 먹기 위해 움직이는 건 아닐까'란 생각도 해보지만 제발 그런 정신상태로 이런짓을 하는건 아니길 간절히 바란다. 그럴거면 먹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않는 것이 시간도 단축시킬수 있고 훨씬 덜 소모적이다. 시간을 헛되이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냥 막무가내로 노는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감정적 풍요를 완전히 느낄 수 있는 즐김이 아닌이상 시간을 떼우는 행위자체를 몸소 거부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살기엔 주어진 나의 시간이 1도 아깝다는 마음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AB형은 계산적이고 까탈스럽다. 손해보길 싫어하는 타입이다. 어릴땐 그 수치가 작은 범주에 해당해서 치사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나이도 있으니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싶다. 물질적인 것 이상의 가치를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값어치 있는 것들에 대한 계획들도 조금 더 세우고 싶다. 이런 현상은 계산의 성장이다. 작은 것을 잃어도 큰 것 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릇이 큰 사람이 되고 싶지만 사실 아직 멀었다.   

다시 수련으로 넘어가자. 수련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봐도 이것의 규율성을 나는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사실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고작 몇달 열심히 한거가지고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내가 다 우습다. 근래의 사계절은 지켜봐야.. 달이 아니라 년으로 넘어가고 난 후에 그런 변화들을 감지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하는 생각들은 그저 푸념에 지나지 않는다. 뭐든 피하고 싶어하는 반작용이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고 도망갈 궁리를 한다. 이런 마음은 평균적으로 판단했을 때 늘 핑계였다는 것도 많은 경험을 통해 드러났다. 사실 더디지만 분명히 좋아지고 있는데 그 속도가 정말 너무 더뎌서 스스로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덧붙이자면, 이 좋아지고 있음에 대한 계산중 하나더 고려해야 할 사항은 노화다. 내 나이도 있으니 20대 때의 혈기왕성하던 회복력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내가 양심도 없는 인간인거다. 시간의 흐름을 멈춰버리거나 역행시키려는거라 생각한다. 흐름에 맞추어 사고도 자연스레 함께 흘러갈 수 있는 성숙된 수련이 되길 바란다.

사실 이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이런저런 자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실제로 수련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아직 수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의 가장 커다란 목표는 다리를 목에 거는 거였다(다른건 그래도 대충 따라하다보면 미래가 보이겠거니 하는데 그것 만큼은 좀 다른 문제다). 하지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실로 가까운 시일내에 내가 느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나는 요가수련 외에 평소에는 극도로 움직이기 싫어하는 타입이다. 앞에도 말했던, 소모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탓인지 움직이기로 마음먹지 않으면 좀처럼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거의 몸에 어떠한 시동도 걸리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나에게 있어 수련의 상태는 평소 의지가 없는 나의 삶에서 아주 유일한 육체적 의지가 확고한 상태이다. 아쉬탕가 요가를 좋아하는 것은 아사나의 흐름안에서 내가 조금씩 시동이 걸리고 있는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경직되어 있던 내 몸에 기름칠을 하는 느낌, 그러면서 나는 조금씩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다리를 목에 거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런 앞전의 동작들로 몸이 많이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아직까지 어떠한 자극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디에 힘을 주고, 어디에 힘을 빼야 하는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니, 열심히 하기에도 애매하다. 언젠가 그 지점만 찾을 수 있다면 집중력을 높여 어떻게든 뭔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지만 사실 매번 나는 그 순간 대충 넘어가곤 한다. 하다보면 안되는 자세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다. 눈앞에 처리할 무언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상적인 단계로 바로 넘어가려는 것은 나의 욕심이라 생각한다. 그 순서를 내가 잘 안다, 내 몸에 필요한 것을 순차적으로 맞춰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쓸때 없는 욕심은 더욱 부리지 않게 된다. 뭔가를 급하게 이뤄봤자 어차피 또 이뤄낼 무언가를 급하게 찾게 될 것이다. 인생은 끊임없는 과제의 연속이다. 어떻게 살아도 모두 다 죽음에 도달 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과정에 의미를 두지 않을 수가 없다. 언제 이뤄내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접근 되어지느냐가 더욱 중요해진다. 꼼꼼히 움직이다보면 어떤 길이 보인다. 끝까지 가지 못한 길들 사이에 조금씩 빛이 드리워진다. 그 순간의 찰나를 기다리는 것이 더욱 재밌다. 그래서 이제 수련은 장기적으로 멈추고 싶지 않다. 간혹 몸에서 적신호를 보내곤 하면 의무감을 갖고 '쉬어줘야 겠구나' 생각하지만, 긴시간 쉬는 것 만큼은 피하고 싶다. 머릿속이 아닌 몸에 각인되길, 몸이 모든것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백밴딩을 하다보면 몸의 미묘한 뼈 마디마디를 느끼게 된다. 요 근래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는 골반의 움직임만 신경쓰던 척추였는데 이젠 흉추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더 신경을 쓰게 된다. 하나하나 중요하지 않은 요소들이 없다. 그것은 굉장히 쉬운일은 아니지만 쉽지 않는 길을 가는 내가 좋다. 그런게 멋있다는 생각을 하곤 하니까ㅎ, 나의 인생에 있어서 수련은 충분히 가치롭다. 아직 한참 멀었지만 천천히 잘하고 싶다. 노화를 생각한다면 내 몸의 상태를 유지해주는 단 한가지의 방법이 되어간다. 고통이 동반되는 수련이 나를 조금더 천천히 걷게 해준다. 주변의 모든 것들을 둘러보며 한걸음씩 천천히 내딛게 해준다는 것을 믿는다. 어쩌면 고통도 또 하나의 조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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