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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제이 Jun 18. 2022

책 만드는 마음 3 - 이직 결심 그리고

이직을 하려면 퇴사를 해야 하는데…


(2편에 이어)

교정교열은 적성에 맞고 꽤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새로운 걸 아는 걸 좋아했고,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예술 분야 인문서는 내가 모르는 것들만 다루고 있었다. 즉 새로운 분야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매 책이 재밌었다. 아마 큰 문제가 없으면 몇 년 보내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근데 큰 문제가 없었다 뿐이지. 작은 문제들은 곳곳에 있었다. 우선 경력으로 입사해 나와 같은 팀이 되는 선배들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을 ‘버티고’ 퇴사했다. 나가는 선배들은 모두 나에게 ‘먼저 나가서 미안해’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신입인 데다 이렇다 할 다른 경력은 없지만, 꼬박꼬박 책을 만들고 있었으므로 나에게 아주 나쁜 곳은 아니었지만 경력자들은 입사하자마자 눈치채는 것 같았다. ‘여기 좀 이상하다!’


4대보험을 처음 1년간 들어주지 않았다. 4대보험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그냥 주는 대로 받고 있었다. 그마저 새로 입사하기로 한 선배 한 명이 4대보험을 들어주지 않으면 입사를 못하겠다 해서 나까지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 안 그랬으면... (이놈의 4대보험 이야긴 여기가 끝이 아니지만)


또한 작고 소중해서 티도 나지 않을 정도의 급여가 조금씩 밀릴 때도 있었다. 부모님 집에서 살고 있는 나한테는 ‘그냥 언젠가 주겠지-‘ 싶어 큰일은 아니었지만, 지방에서 올라와 경제독립을 한 분들에게는 하루 급여가 밀리면 월세와 공과금, 카드값이 연쇄적으로 밀리는 정말 큰일이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사전 공지나 양해는 없었다. 그냥 그랬다. 그랬는데도 뭔가 ‘돈’을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회사 내에 있었다. (먹 갈아 책 쓰는 건 아니지만 왠지 그런 느낌)


그렇다고 책이 아주 안 팔린 건 아니었다. 여기서 만든 책들은 신문, 방송이 매우 사랑하는 책들이었다. 어떤 책은 그 주 메이저 신문사 전부가 다룬 적도 있었다. 내가 만든 책 하나가 특집 기사가 되어 신문 지면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신문 출판면에서 다뤄주는 게 최고의 마케팅이던 시절이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그 작가님도 인세는 못 받으셨던 것 같다.)


들어오는 돈은 있어 보이는데 쓸 돈이 없다. 세상살이 아무것도 모른 채 ‘책 만드는데 돈도 주네?’ 하는 마인드로 다니던 내 눈에도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재무가 부실하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난 여기서 제작비를 계산해본 적이 없었다. 각종 수입지와 후가공을 맘껏 경험해본 마지막 출판사가 될 줄은 그땐 몰랐다. (다 그렇게 만드는 줄 앎)


또 하나의 문제는 내 눈에도 지금이 위기처럼 보이는데 회사가 바뀌진 않을 것 같아 보였다. 계속 고집스럽게 잘 안 되는 길로 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때쯤 궁금한 것과 하고 싶은 게 생겼다.


팔리는 책은 뭘까?
마케팅을 경험해보고 싶어!


적은 가까이에 있다


그때가 마침 2년, 이직 타이밍이 됐으니 팔리는 책 만드는 곳으로, 마케팅도 하는 곳으로 이직하면 되는 건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차마 퇴사하겠다는 말이 안 나왔다. 바로 결정적인 순간 내가 문제였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퇴사한다는 말을 못 꺼내겠어서 퇴사를 못 하고 있다니…. ‘이 책만 끝나면 나가야지!’ 했는데 바로 다음 책이 주어졌다. 퇴사하겠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그쯤에 사무실을 이사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사도 했다. 이사까지 하고도 퇴사라는 말이 목에 걸린 채로 3개월을 넘게 다녔다. 하도 끙끙 앓자 엄마가 “내가 대신 말해줄까?”라고 했을 정도였다. ㅋㅋㅋ


엄마가 대신 퇴사를 말하게 할 순 없으니 겨우 “저 퇴사하려고요…” 말을 꺼냈다. 친한 선배들이 퇴사할 때 ‘2년만 버텨’라고 말해준 때부터로 치면 1년 반도 넘게 참고 참다 한 말이었는데,  퇴사 사유도 준비해야 하는 걸 몰랐다. 화들짝 놀라며 나에게 브랜드도 만들어주려고 했고, 원하면 임프린트도 만들어주려 했다며 왜냐고 묻는 사장님 앞에서(이것도 할말이 넘 많지만) 어버버하고 있었더니 “수능이라도 봐?”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수능을 보면 퇴사할 수 있겠구나!’ 싶어 냉큼 “네!”라고 대답했다. “수능 신청은 했고?”라는 질문이 돌아올 것도 좀 생각해라 인간아..


거짓말할 재주가 없는  고등학교 졸업한  7 만에 수능 수험생이 되었다. 시험을 등록한 김에 수능도 보기로 했다. 이왕 수능을 보기로 한 김에 공부도 했다. 수능이 뭐라고 전날 잠도 설치고 몽롱하게 시험을 봤는데 50 공부한 거치고는 성적도  나와서 입학 원서도 넣고 교대에 면접까지 보러 갔었는데지금 생각해보니 기왕 하는  1  공부해볼걸 그랬나…?


여튼 우여곡절 끝에 첫 회사를 퇴사했다는 이야기. 생각해보면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후자 쪽이겠지)… 지금의 난 좀 덜 어리버리하니까 날 만들어준 혹독한 사회에게 감사를.



* 4대보험에 뒤늦게 가입된 건 날 두고두고 날 귀찮게 했는데, 대학원 들어가기 위해, 이직하기 위해 경력을 증명할 때 경력증명서 대신 4대보험 가입이력을 내도 된다. 나는 그러면 경력이 1년 넘게 날아감. ㅜㅜ


* 첫 회사에서 나와서 빛을 못 본 책 중에는, 나중에 대형출판사가 고스란히 가져가 초대박 낸 책도 있었다. 기획 초기, 사장님이 어떻게 아이디어를 내고 그 저자분들을 모았는지 지켜봤다. 그 모으기 힘든 분들을 모셔서 책을 집필시키고, 퀄리티 끌어올리려고 얼마나 정성껏 리라이팅을 했을지도 눈에 훤히 보인다. 그런데 만든 사람은 벌지 못한 돈을 가져간 사람이 벌었다. 난 서점 메인에서 그 책을 볼 때마다 아팠다. 판매가 잘되는 만큼 그 책은 오래오래 서점 메인에 있었다.


* 책을 대하는 태도와 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이곳만큼 깊이 고민하는 곳을 다시 만나는 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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