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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느 Nov 22. 2021

클라이밍과 처음 만난 날, 인연이 찾아왔다 1

"조만간에 만나서 클라이밍도 하고 여러 가지 하자! 담주 토요일에 갈까?"


단팥 언니의 제안으로 8월 21일, 클라이밍 원데이 클래스를 듣게 됐다. 그동안 러닝, 등산, 수영, 필라테스, pt 등등 여러 운동을 배우고 해왔지만, 클라이밍을 배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웨이트를 시작한 지 이제야 2년 채울까 말까 한 내게 -그마저도 설렁설렁했는데- 클라이밍 홀드를 잡을 만한 힘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영상으로 본 클라이머들은 다들 홀드를 손쉽게 잡을 수 있는 단단한 손과 팔뚝을 가졌고 크고 작은 홀드를 날래고 정확하게 딛는 대단한 하체 힘이 있었다. 클라이밍 같이 하자고 권한 단팥 언니도 작년 여름, 식단과 운동을 철저히 병행해 바디 프로필을 찍은 이력의 소유자였다. 반면에 나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해보기로 했다. 새로운 운동을 배울 용기를 낸 것은 언니의 제안이 있어서기도 했지만, 그때 당시의 나는 매일 몰두할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우울함과 슬픔을 떨쳐낼 만한 무언가를. 특정인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고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잠시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8월 초에 오랜 기간 만난 사람과 정리했다. 신뢰가 깨지는 문제가 생겨서였다. 상대가 나와의 신뢰를 저버렸다는 건 이전부터 알았지만, 마음을 정하지 못해 괴로운 상태로 만나오다가 8월 12일과 13일, 퇴근 후 확인한 이메일을 통해 상대가 그동안 숨겨온 모든 언행을 알게 됐다. -이 자리를 통해 빅데이터 자료 하나 더해봅니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없고, 바람피운 사람은 절대 받아줘선 안 된다는 것을. 상대가 울고 빌고 해도 그뿐이라는 것을요.-


상대와 헤어진 슬픔을 느낌과 동시에 지인들이 떠올랐다. 상대와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여서 겹치는 지인이 많았고, 그들을 만나면 헤어진 이유를 필연적으로 말하게 될 터였다. 그중에서도 가깝게 지내는 사이인 단팥 언니와 멀어질까 봐 두려웠다. 새벽까지 고민하다가 동틀 무렵 긴 이야기를 적은 메시지를 언니에게 보냈다. 걱정이 무색하리만치 언니는 내게 '두 사람의 일로 자신과 멀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얘기해주었다.


다시 원데이 클래스를 들은 날로 돌아가자면, 장마 기간이었던지라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어차피 가면서 비를 맞을 테니 조금이라도 일찍 가서 옷을 말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비 오는 날의 축축함과 우울한 느낌을 싫어하지만-약속이 있다면 취소하고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정도로- 이날은 빨리 암장에 가서 새로운 운동을 배우고 싶다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선유도에 있는 클라이밍장에 도착해 본격적으로 체험을 시작했다. 다른 암장에서 여러 번 원데이 클래스를 들은 경험이 있는 언니와 함께하니 마냥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클라이밍이라는 낯선 운동과 좀 더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또 일일 체험을 진행하는 선생님의 알아듣기 쉽고 정확한 설명과 시범이 클라이밍의 매력을 알게 했다. 클라이밍은 리드, 스피드, 볼더링 클라이밍 세 종류가 있고 실내 클라이밍장은 주로 볼더링 클라이밍을 한다고. 볼더링 클라이밍의 규칙과 낙법, 인사이드 스텝과 벽 짚기 등등을 배웠다. 선생님의 시범을 볼 때마다 '저 홀드를 저렇게 쉽게 잡는다고? 저런 몸놀림이 가능하다고?'라고 생각하면서 감탄한 기억도 있다. 그때부터였을까요. 선생님에게 일단은 인간적인(?) 호감을 느낀 것은.


어렵게만 느낀 운동을 직접 해보기도 하니 한 시간이라는 체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체험이 끝나고도 암장을 이용할 수 있다길래 단팥 언니와 3시까지 머무르며 빨간색, 주황색 난이도의 문제를 여러 개 풀었다. 이렇게 쓰니 혼자서 척척 잘한 것 같지만, 전혀 아닙니다. 체험 진행해준 선생님이 중간중간 오셔서 손과 발 자리도 알려주고 신경 써주셨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오래 머물러서 빨리 풀고 나가라는 무언의 눈치를 주시는 건가 하는 생각도 했다. 거리두기 단계가 완화되지 않을 때라 면적당 제한 인원이 있어서 대기 인원이 있는 게 보여서였다. 12시부터 했으니 슬슬 배고프기도 해서 정리하고 나왔다. 단팥 언니와 호두과자와 햄버거를 먹고 헤어졌다.


새로운 운동을 배운 성취감과 단팥 언니와 좋은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 기쁨, 상처의 감각이 점점 무뎌지고 있음을 깨달은 이 날의 마음을 사진과 함께 인스타그램에 기록했다. 다 쓰고 보니 새벽이었다. 글의 일부분을 이곳에도 남겨본다.


"평소와 같이 주 3회 이상 아침 운동, 주 5회 이상 저녁 운동을 하고, 하루 한 끼는 야채가 가득한 식사를 차려 먹는다. 좋았던 기억, 주고받았던 대화가 불쑥 치고 들어와도 계획한 루틴대로 운동을 해낸다. 이렇게나 금방 괜찮아져도 되는 건가,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담담한 기분이다.


의외로 아무 일 없는 듯이 일상을 보내는데, 자신을 망치지 말자고 다짐한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올해 좋은 운동 선생님들을 만나서인 것 같다. 그들에게 받은 긍정적인 에너지가 내 몸에 차곡차곡 쌓인 느낌. 이 에너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습관이 된 것 같다.


(...)


내게 많은 행복을 안겨줌과 동시에 상처 준 이를 걷어내니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발걸음이 느려지는 순간이 오면 내 안에 간직하고자 한 배움을 떠올려야겠다."


글을 끝맺은 뒤 클라이밍장 계정을 태그하고 해시태그를 잔뜩 달아 올렸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잠들었고, 다음날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하니 여러 사람이 내 글에 하트를 눌렀다는 알림이 보였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계정과 댓글이 있었다.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해준 선생님이 나를 친구로 추가하고 댓글을 달아준 것.


"어젠 재밌게 하셨나요!? 클라이밍을 통해서 생각을 정리하고 즐거운 생각으로 채울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다음에 또 놀러 오세요~^^"


내 상황과 속내를 가감 없이 쓴 글을 선생님이 봤다고 생각하니 약간의 민망함이 몰려왔다. 조금 감출 걸 그랬나? 싶었다. 아니, 그전에 어제 본 사람한테 이렇게 친근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이라니. 그리고 '또' 놀러 오라니. 대단한 '인싸'임과 동시에 영업력이 대단한 사장님인 것 같다고 느꼈다. 답글을 달기 전에 선생님의 계정을 들어가 봤다. 팔로워와 팔로잉이 모두 천 명이 넘었다. 인싸 맞구나. 그렇다면 이런 사교성 인정하겠습니다. 답글을 뭐라고 달지 잠시 고민했다.


"어제 정말 잘 알려주셔서 즐겁게 클라이밍 할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또 하러 갈게요! :)"


이것이 우리가 나눈 첫 대화(?)였다. 이때는 몰랐지, 인사치레로 또 하러 가겠다고는 썼는데 정말로 클라이밍 배우려고 등록까지 할 줄은.


단팥 언니가 찍어준 우리의 사진(?). 이때는 단순한 수강생-선생님 포지션의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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