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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느 Jun 23. 2024

일기 쓰듯이 (2)

~ 240623

새로 일하게 된 곳에서의 업무는 서류를 정리하고 데이터를 입력하는 일이다. 통칭 사무보조라고 말하는 그것. 내가 주로 확인하는 서류는 환자가 보험회사에 제출하기 위해 병원에서 떼온 진단서, 진료 영수증, 소견서 등인데, 이 내용을 데이터화하여 환자가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병원과 짜고(혹은 의료진을 감쪽같이 속여) 가짜로 만든 병명인지, 실로 아팠는지를 보험회사 측이 쉽게 판단하도록 돕는 일이다.


암병원, 한의원, 안과, 치과 등 각종 병원 서류를 매일 확인하고 병명들을 텍스트로 다루다 보니 가슴이 섬뜩해지는 일은 바로 여기서 일어나곤 했다. 무감각해지고 마는 일, 섣불리 고통을 판단하는 일, 속단하는 일.


팀장에게 받은 파일을 보자마자 저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동일한 병명으로 오랫동안 입원한 환자의 서류를 확인하고, 특이사항을 발견하면 자료를 입력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나, 오래 입원한 사람이라면 그만큼 봐야 하는 서류의 양이 많아진다. 얼마나 입원했는지, 어떤 수술을 받았는지, 이로 인해 얼마 큼의 보험금을 타갔는지를 살펴보다가 그중에서도 특히 입퇴원이 잦은 환자 한 명을 발견했다. 본인 부담 금액이 큰 검사를 다수 받았지만, 그만큼 받아간 보험금 총액도 큰 경우였다. 보험금 사기의 유형 중 하나로 꼽히는 경우였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스크롤을 내리며 스캔을 떠 제출된 서류들을 쭉 훑어나갔다. 1년 이상 지속적으로 보험금 지급을 받았다면 유의해 봐야 하는 사람이라고 보고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그동안 확인한 증빙서류가 아닌 사망 진단서를 발견한 순간. 보험금을 받은 사람이 본인이 아닌 자녀임을 알게 된 순간 비로소 그는 활자로만 나타나는 자료가 아닌 '사람'이었음을.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나는 화면 너머,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까.


충격은 퇴근하고서도 가시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근처 강변으로 달리러 나갔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6km 정도를 뛰었더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땀이 이마와 얼굴선을 타고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이토록 존재의 감각을 느끼고 싶어 하면서, 타인에게 있어서는 이 같은 마음을 내어주기를 힘들어하는가. 도의와 공감과 사회성 같은 것들. 사람이라면 지녀야 할 태도를 나도 모르게 잃어버렸고 그걸 한참 뒤에 알았다는 게 무서웠다. 그리고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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