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거짓말이란게 존재할까요?
실제로 모에카의 계획은 엄청난 빡빡한 것이였다. 하루에도 몇 가지의 장소에 방문하고 배가 터져라 많은 종류에 음식을 먹어야겠다. 그리고 나는 거짓말도 많이 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짜던 오니기리, 갑자기 비가 쏟아져 홀딱 젖은 날, 이상한 맛이 났던 이름 모를 우유…
그 우유는 맛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아마 우유가 아닐지도 모른다.
또 어떤 날에는 길을 잃고 헤매어서 진이 빠질 정도로 한참을 걸어야 했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항상 모에카에게 모든게 행복했고 맛있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녀가 짜준 계획이니까. 모든게 맛있고 모든게 행복해야만 했다.
어느 날은 모에카가 이렇게 보내왔다.
[시눈,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해보는게 어때요? 그냥 동네 벤치 같은곳에 앉아서 하루를 보내는 거죠. 사실 저는 그런 걸 더 해보고 싶었어요. 정말 그곳에 사는 사람처럼. 별일 없는 하루를 지내보는 것, 심심한 하루를 보내곤 터벅터벅 집에 돌아오는 것, 그런게 지구의 일상이잖아요. (웃음)]
솔직히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꽉 찬 일정에 슬슬 지쳐가던 참이었으니까. 이번 여행을 통해 알게 된 건, 여행은 과대평가된 것이 '맞다'라는 거다.
일본의 일상은 서울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별한 감동도 없었다. 딱 하나, 여기선 돈을 쓰고 서울에선 돈을 벌어야 한다의 차이 정도?
다음날 아침에 나는 개운하게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뛰었다. 모에카와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한 뒤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모에카를 위해 이것저것 먹어대니 어느 순간 몸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모에카에게 보여주는 사진 속 내 모습이 신경 쓰였다. 모에카는 혹여 내가 살이 찐 걸 알게 되면, 괜히 미안해할 사람이다.
갑자기 먹고 싶은 게 없어졌다고 거짓말까지 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래서 나도, 더 신경을 쓰게 됐다.
그렇게 달리기도 내 일상 중 하나가 되었다. 처음엔 뛰는 행위가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몸이 고통스러울수록 반대로 정신은 더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처음 1km쯤은 별 생각 없이 달린다. 오늘 뭐 먹을까, 어제 뭐 하다 잤지? 그런 가벼운 생각들.
조금 더 달리면, 조금 더 무거운 주제들이 따라온다. 요즘의 고민, 내 삶의 방향, 잘못 흘러가 버린 과거의 선택들.
보다 더 멀리 달리다 보면 마침내 아무런 생각이 없어지게 된다.
머릿속엔 1차원적인 단순한 생각들 밖에 들지 않는다. 햇빛이 내리쬐는구나, 기분 좋게 바람이 불어오는구나... 그런 생각들만 남게 된다.
산책을 나온 강아지들이 이래서 그렇게 행복해할까? 생각을 비운다는 건 생각보다 멋진 기분이다.
그저 시각, 촉각, 후각 같은 감각만 남고 잡념과 고뇌들은 없어진다. 아마도 몸이 생각하는 에너지까지 아껴 달리는 데에 사용하려고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 라는 근거 없는 추측을 했다.
여하튼 나는 그 시간을 애정하게 되었다. 이 또한 모에카의 덕분이다.
일본 시골길을 달리니 도시에선 맡을 수 없는 젖은 흙냄새와 내 발자국 소리만이 들리우는 고요함. 그런 것들이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줬다.
흐르는 땀을 옷으로 대충 닦곤 덩그러니 놓여있는 벤치에 누웠다. 푸르른 하늘과 구름들이 눈 안에 한가득 들어왔다. 선선하게 부는 바람은 내 옷 안으로 살며시 들어와 나를 간지럽혔다. 이따금씩 새가 지저귀는 소리, 바람에 나뭇잎들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한참을 그냥 그렇게 누워있었다.
푸르른 하늘에는 하얀 구름 한 조각이 떠있었다. 모양을 바꾸어 가며, 한참을 내 시야에서 천천히 떠내려갔다. 멍하니 그 구름을 바라보며 하루가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아마... 이게 모에카가 말한 지구의 일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그렇게 바라고 상상했던, 아무 의미 없는 하루.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각들을, 하나라도 더 전해주고 싶었다. 저기 하늘에 떠있는 구름 한 점까지 담아 모에카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전해주어야 할까? 오늘따라 내 어휘력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래, 아무래도 직접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그 생각이 들자 벌떡 일어났다. 여기서 감성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다. 나는 도망치러 온 게 아니다. 목적이 있고, 이유가 있다.
나는 다시 숙소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급해져 중간부터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호흡도 마음도 점점 더 가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반드시, 5년 안에 모에카를 데려올 것이다.
[에~ 그럼 반나절을 거기 벤치에만 앉아 있었던 거예요? 우와 너무 멋지다. 제가 바라던 심심한 일상이에요. 그러고 보면 시눈도 조금은 지쳐 있었나 봐요? 제 계획이 너무 타이트하긴 했죠…? 그래도 ‘푹 쉬었다’는 말을 들으니까 마음이 놓이네요.]
그래, 나는 또 모에카에게 거짓말을 했다. 실제로는 정오쯤 집에 돌아와 작업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모에카에게는 하루 종일 벤치에 앉아있다가 가까운 가게에 들어가서 밥을 먹고 조용한 카페에 앉아 멍하니 있다가 노을이 질 때쯤 터벅터벅, 하루가 끝나감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내 진짜 하루보다, 그녀가 상상한 내 하루가 더 행복하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이다.
이제 내 일본여행도 끝자락에 다 와갔다. 마지막일정은 온천에 가는 것. 지금까지 묵었던 숙소에서 나와서 내일은 온천이 있는 료칸으로 옮긴다. 가는 길엔 모에카가 말한 라멘을 먹고, 기념품을 하나 사야 한다.
[시눈! 꼭 기념품 하나는 사 와야 해요. 이건 제가 정해줄 수 없어요. 정말 쓸모없는 거라도 괜찮아요. 두고두고 보면서, 나중에 행복했던 일본 여행을 떠올릴 수 있도록!]
그게 모에카의 주문이었다. 나는 내 여행에 대해 늘 '좋았다, 맛있었다, 행복했다'라고 말했다. 모에카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있다. 이번 여행이, 내게도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을 거라고...
... 아마도. 어쩌면 나는, 예전엔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 여행을 과장해서 말하고, 감정을 덧칠해 추억으로 포장하는 그들처럼 모에카에게 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들을 하니 마음 한구석이 찝찝해져 왔다. 내일은 좋든 나쁘든 있는 그대로 모에카에게 내 경험을 전해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선 꼭 좋은 하루를 보내야겠지.
방안에 널 부러트렸던 짐들을 모두 캐리어 안에 담았다. 마치 여행이 마무리 짓는 듯한 기분이 느껴지는 행위였다. 하지만 아직 내겐 하루가 더 남아있었다.
캐리어를 들고 신발끈을 꽉 매고 현관문을 밀어 나오려던 찰나, 왠지 모를 섭섭함에 뒤를 돌아 텅 빈 방을 한번 더 보았다. 6일… 6일가량을 이 숙소에서 보냈으니 어쩌면 내 뇌는 이곳을 내 새로운 보금자리라고 착각해 버린 건 아닐까? 괜시리 드는 아쉬움을 뒤로한채 문을 밀어 밖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서니 쨍한 햇빛이 나를 반겨주었다. 지저귀는 새의 소리들도 도심에서 느낄 수 없었던 그러한 풍경들, 그러한 냄새들, 아쉬운 마음에 캐리어를 드르륵 끌고 다니며 동네 한 바퀴를 더 돌아다녔다. 이전에 갔던 야키토리집, 모찌를 먹었던 곳, 우동을 먹었던 곳, 사소한 기억들을 곱씹으며 이러한 망상을 해보았다.
우리도 모에카의 부모님들처럼 이곳에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같은 흙길을 뛰어다니며 서로를 보고 웃고 장난치고,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오래된 책방으로 비를 피해 들어가 눅눅해진 책들의 냄새를 맡으며 조용히 책을 읽고, 비가 그친 후 서로가 읽었던 책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사소하지만 서로가 있기에 특별한, 그런 추억들을 쌓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망상들에 빠져 정처없이 걷다 보니 처음 보는 가게 앞에 도착했다. 바래진 간판 위에 겨우 읽을 수 있을 정도의 글자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이 동네를 아침마다 매일같이 뛰어다녔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곳이였다. 어쩌면 눈에 튀지 않아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낡은 문을 당기자 ‘끼익—’ 소리가 울렸다. 안은 고요했고, 먼지 낀 진열장 안엔 머리 모양의 인형들이 가지런히 서 있었다. 예전에 영화에서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중 하나를 들어 이리저리 돌려보던 순간,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다루마 인형이에요.”
아무도 없는 적막 속에서 어떠한 노파 한 명이 내게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그 노파의 설명으론 이 인형은 군마현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옛것이 되어 찾는 사람이 없지만.
일본도 한국과 비슷한 실정이다. 도시는 젊은이들로 북적이지만 이런 시골 마을은 점점 더 조용해지고 가끔씩 찾아오는 여행자들만이 쌓여있던 먼지를 흔들어 놓는다고 한다.
사람이든 장소든— 자주 찾는 것은 더 많은 발길이 이어지고, 소외된 것은 점점 더 아무도 찾지 않게 된다. 먼지가 쌓여 나란히 진열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이 인형들에게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중 크기가 적당한 놈을 하나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루마 인형엔 눈동자가 없었다.
“한쪽 눈에 눈동자를 그리고 소원을 빌어요. 그리고 그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나머지 눈을 그려 넣는 거랍니다.”
뒤에서 내 모습을 지켜보던 노파가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뭐 내겐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기념품을 하나 사야 했었는데 그럴싸한 이유까지 가지고 있는 걸 만났으니까. 이 이야기를 모에카에게 어떻게 전해야지 모에카가 재미있어 할지 생각하며 다루마 인형을 하나 들고 그 가게를 빠져나왔다.
예약한 료칸이 있는 동네에 도착했다. 짐을 풀기 전 한 군데 들려야 하는 곳이 있었다.
[저희 부모님은 군마현 시부카와시, 돌계단 꼭대기 언덕 위에 자리한 조그마한 신사에서 처음 만났다고 해요. 거기서 만나 신사 앞에 아무도 쓰지 않는 조그마한 우편함 안에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해요. 옛날 사람들이 하는 그럼 아날로그 한 방식으로요 (웃음). 낭만적이지 않나요. 아직도 그 우편함에 편지들이 남아있을까요?]
예전에 그 메시지를 받자마자 그곳이 어디인지 찾아보았었다. 어렵지 않았다. AI를 통해서 위치는 쉽게 특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부러 그 신사옆에 료칸을 예약했다. 내 마지막 스케줄은 그 신사에 방문하는 것이다.
... 짐을 풀어놓고 올걸 그랬다.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돌계단을 오르다 보니 몇 번이고 숨이 차서 멈춰 서야만 했다. 이제와 찾아보니 계단의 갯수가 365개 란다. 무얼 상징하는지는 알겠는데... 지금 나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았다.
돌계단은 관리가 잘 되지 않은 듯 사이사이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기도 했고, 깨지거나 빠진 계단들도 있었다. 주변에는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계단 중턱쯤 높게 자란 풀 속에 캐리어를 숨겨두곤 맨몸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언덕의 끝에 올라서니 이 신사가 왜 이렇게 사람이 없이 조용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언덕 위에는 검은 그을린 자국과 잔해들, 코를 찌르는 탄내만이 존재하였다. 모에카의 부모님이 서로를 만나 마음을 나누었던 그 장소는 까맣게 불타 없어진 것이다.
허무했다. 나는 그 신사의 잔해들의 사진을 찍어 두었다. 아무래도 그 편지함은 찾을 수가 없었다. 모에카에게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할까 고민하며 터덜터덜 돌계단들 다시 내려갔다.
아무래도 사실대로 전해야겠지?
일본에 와서 작은 거짓말들을 너무 많이 했다. 아무리 모에카를 위한 거짓말들이라고 해도 왠지 그 무게는 내 쪽에 쌓여가는 느낌이였다. 오늘은 있는 그대로 내 하루를 전해줘야겠다고 다짐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