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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사진 Feb 07. 2023

울음의 이유

못한 공부와 하늘소 장난감 사이

  눈시울이 붉어진 꼬마는 금세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고는 책상 밑으로 숨어버렸다. 자기의 눈물을 내보이지 않으려는 듯, 그것은 또 아빠의 얼굴을 보기 싫다는 것처럼도 보였다. 찬찬히 꼬마의 잘못을 설명하고 설득하려던 나의 여린 풍선은 뻥 하고 터져버렸다. 무엇이 꼬마의 눈물샘을 자극했을까.      


  엄밀히 따지면 꼬마가 울게 된 상황이 생긴 것은 내 탓이 컸다. 갑자기 일이 생겨 나는 아이들의 저녁을 차려주고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신는 그 찰나에 서두르는 말로 아이들에게 당부했다. 목욕부터 공부까지. 아이들의 자신감에 찬 대답을 들었지만, 나는 일하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럴 때 아내까지 회식이라니, (아이들을) 챙기지 못할 이유는 엎친 데 덮쳤다. 한참 일에 집중하고 있는데 꼬마한테 전화가 왔다.      


   “아빠, 어디 갔어요? 지금 뭐 해요?”라고 물었다.

   “회사지, 아빠 지금 일하고 있어.”라고 대답했다.     


  얼른 일을 마치고 싶었지만 성격상 그게 잘되지 않았고, 그 바람에 예정된 귀가 시각보다 더 늦어졌다. 집에 돌아와 맨 먼저 꼬마와 눈이 마주쳤을 때 괜스레 미안하고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어느덧 열 시, 잠잘 시간이 다 된 걸 알고는 꼬마가 스스로 칫솔을 들었다. 닦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집안을 돌아다녔지만, 나는 그사이 거른 저녁을 먹었다.      


  꼬마는 “오늘은 한 일이 없는데요. 쓸 게 없어요.”라며 일기를 건너뛸 핑계를 댔다. 나는 그 순진한 레퍼토리는 눈감아줬지만, 꼬마가 오늘 할 일을 다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출근했을 때 꼬마는 전화상으로 “아빠, 공부 재밌게 할게요.”라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자기 방으로 들어가 학습 교재를 챙기던 꼬마는 머뭇거렸다. 내가 꼬마 방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공부는 되어 있지 않았다. 달성률로 따지자면, 할 일의 반 정도만 끝낸 셈이었다. 꼬마는 오늘도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한 것 같았다.     


  나는 무릎을 꿇고 꼬마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했다. 대화라기보다는 타인(꼬마에게는 자기) 다짐을 받는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스스로 재밌는 공부의 필요성’을 설명한 후 돌아온 꼬마의 대답은 “공부를 재밌게 하려고 하는데 재밌는 마음이 안 생겨요.”라는 말이었다. 그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세상에 공부가 재밌는 아이가 몇 명이나 될까. 꼬마가 그 소수에 들어가지 않는 자각이 믿고 싶지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꼬마에게, 또 내게도 ‘재밌게 하는 방법’은 숙제로 남아 있으니까.     


 

  꼬마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 것은, 누구도 ‘재밌게 하는 방법’이 뭔지 몰라 머뭇거릴 때, 내가 꼬마의 하늘소 장난감을 만진 직후였다. 주말에 산 모형 장난감의 배 부분이 떨어져 꼬마가 목공풀로 붙여 굳히려고 뒤집어 놨는데, 내가 그걸 모르고 반듯이 세우고자 도로 뒤집었더니 풀질을 망쳐버린 것이다.


  “아, 미안 미안!” 부랴부랴 내가 꼬마에게 사과했지만, 꼬마는 원망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필, 그때 그걸 왜 만져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옆에 있던 딸이 이러쿵저러쿵하며 “다시 붙이면 될 거 같은데요.”라고 훈수를 두었다. 꼬마는 마냥 울었고, 나는 멍하니 딸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꼬마의 눈치를 살폈다. 꼬마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눕지 않고, 앉아서 계속 울었다. 내가 꼬마에게 다가가 마주 보며 물었다.     

 

    “아들, 아빠한테 서운해? 하늘소가 망가져서 그래?”      


  꼬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늘소 때문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였지만, ‘그걸 제가 콕 집어 말해 줘야 알아요?’라는 의미로도 해석되었다. 울음의 시초는 ‘하늘소’를 만진 순간이었는데, 그전에 아빠와 한 ‘공부의 대화’까지 울음의 범위가 확장된 느낌이 들었다. 부정의 고갯짓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울음의 이유는 당연히 ‘공부’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불이 꺼진 방에서, 나는 꼬마의 가슴을 만지며 말했다.


   “여기, 안에 있는 마음을 말하지 않으면 아빠는 잘 알 수 없어.”     


  그렇게 같은 의미를 다른 뉘앙스로 여러 번 말했지만, 꼬마는 울음을 뚝 그치지 않았다. 별수 없이 다시 물었다.


   “오늘은 말하고 싶지 않아? 그럼 자고 일어나 내일 이야기할까?”      


  그제야 꼬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자리에 누웠다. 무엇 때문인지 짐작은 가지만,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꼬마가 솔직히 입을 열지 않는 이상. 나는 꼬마의 울음 앞에서는 자주 마음이 약해진다. 되도록 헛되거나 의도된 울음은 간파하고 매몰차게 잘라내려고 하지만, 오늘의 울음은 어쩐지 진짜 같이 느껴졌다. 꼬마가 울 수밖에 없었던, 울음을 멈출 수 없었던 ‘타당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 잘못으로 인한 하늘소의 허물어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해야 할 공부가 하고 싶은 마음으로 될 수 없는 것’ 이 힘든데 그 마음을 아빠한테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작은 얼굴, 더 작은 머릿속에 담긴 꼬마의 세계가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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