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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샘 Jun 09. 2023

01 나는 왜 한국어 강사였을까?

한국어 강사의 시작점


 지금까지의 나의 직업을 크게 나누어 보면 사무직, 컨설턴트, 자영업 이렇게 세 가지이다. 대학의 전공으로 선택한 백화점의 사무직, 결혼 정보회사의 전문직 전담 컨설턴트 그리고 우연한 기회로 선택한 의류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위의 직업들은 늘 사람을 상대하면서 조직 내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이라 나에게는 조금 힘들었다.


 지금에서야 MBTI를 통해 INFJ의 고독성을 인지하고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나만 이렇게 적응을 못하나 뭐 이런 생각들로 힘들었다. 잘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을 모르고 힘들어했다. 조직 생활도 사람을 응대하는 일도 모두 나에게는 어려웠다. 그 당시 사회는 그게 전반적인 직업의 형태로 그것을 버거워하는 것 자체가 낙오를 뜻했기에 그것을 내색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음 직업으로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만 일할 수 있고 일의 진행이 혼자 가능한 일, 그리고 내가 선택해서 일할 곳으로 갈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일처럼 사람들이 나를 찾는 것이 아닌 내가 선택해서 갈 수 있는 그런 일) 거기에 만족감과 보람을 동반한 일은 바로 '교육'이었다. 물론 나는 교직을 이수한 적도 없었고 교육과는 정말 관련이 없었다. 교육은 안 해본 일인 데다가 그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결국 '강사'라는 직업을 선택했고 그중 한국어를 외국인에게 가르치는 '한국어 강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내 전공과는 완전히 다르기에 조금은 진입이 수월한 교육 전공을 찾아야 했다. 이 생각은 나중에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나 역시 한국어를 쉽게 여기고 진입을 결심했던 것 같다. 이런 무지가 무모함으로 연결되어 한국어 강사로의 시작은 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래서 시작할 수는 있지 않았나 싶다. 아마 지금 알고 있던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나는 이 길에 대해 조금은 주저하지 않았을까 싶다.


고등학교 담임선생이라 진로 상담이 일상인 친구가 "넌 지금 나이가 몇인데 진로 고민을 아직도 하고 있냐?"는 농담을 들을 정도로 오래 고민을 하고 진로를 선택하고 보니 이것을 하는 것에도 자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학 석사가 필요했다. 이게 기본 자격 요건이었으며 졸업 논문도 써야 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대학원 진학을 결정하고 졸업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전혀 해  보지 않았던 공부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나는 국문학과 전공도 아니다. 이렇게 다른 공부를 할 수 있을까?  교육대학원 석사 오 학기 과정을 마칠 수는 있을까?  학비는 국립대를 선택하면 경제적이니 감당 가능했고 그 외의 공부와 발표, 시험, 논문 막연하고 두려운 것들 투성이었다. 그때 남편의 적극적인 지원과 응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남편이 고민하던 내게 '남편 장학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이 얼마나 든든하던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남편은 언제나 나를 응원했고 지지했다. 그 덕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닐까 싶다. 문득 남편에게 감사의 마음이 든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국립대학교가 있었고 한국어 강사가 되는 방법 두 가지, 교육대학원 과정과 단기 양성 과정이 모두 있었다.  빠른 취업을 하기에는 양성 과정이 좋았지만 그 당시 이런저런 정보를 보니 점점 석사 졸업생 위주로 취업이 진행된다는 글이 있었기에 고민하다가 결국 교육 대학원 입학 원서 마감일이 하루 지나버렸다. 그 일로 갑자기 나는 초초해졌다.


결국 해당과 교수님 연구실 전화번호를 수소문해서 여쭈었더니 다른 방법이 없다고 그냥 다음 학기 지원하라고 하셔서 그동안 정보를 더 알아보고 하고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면서 이직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하고 있던 매장의 영업시간을 줄이고 돈벌이가 줄어드는 것 또한 각오했다.


수업 시간이 저녁 6시 반이라 빠른 폐점이 필수였고 매장 근무 중에도 과제와 발표 준비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각오했다. 이직이 지금의 젊은 친구들에게도 쉽지 않겠지만 나처럼 나이가 있는 상태에 원래 벌이를 포기하는 것은 조금 더 무모하고 힘든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다음을 위한 준비가 없으면 나에게도 다음 직업은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던 시기였다.


다음 학기에 원서 접수를 하고 시간이 흘러 대학원 입학 필기시험과 면접을 봤는데 지금은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발음 체계를 표로 만들어 외웠던 게 생각난다. 무엇이 나오던지 모르면 이거라도 쓰고 나오자 그게 채점하는 교수님에 대한 예의이며 성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진짜 그것을 쓰고 나왔다. 한국어 음운 체계와 다른 언어와의 비교였는데 외운 것을 바탕으로 답안지를 채웠던 것 같다. 그때는 일단 답안지를 채웠다는 것에 나름 뿌듯했다. 지필시험을 볼 때 옆자리 학생이 아무것도 못 쓰고  있어 그것도 걱정이었던 기억만 남아 있다. 내 코가 석자인데......


어찌어찌 지필 시험을 통과하고 면접을 봤는데 국문학과 교수님의 질문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이를테면 "국문과 전공도 아닌데 수업을 따라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본 국어에 관한 지식이나 관심이 원래 있었냐?" 뭐 이런 것들을 물으셨던 것 같다. 속으로 오지 말라는 건가?, 아니면 기죽이는 건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질문이셨겠지만 그때는 스스로 위축되고 불안하던 때라 많이 속상하고 풀이 죽었다.


나중에 합격한 동기들과 그다음 기수 후배들에게 들으니 다들 그랬다고 했다. 오 학기 과정을 끝까지 마칠 수 있는 사람들인가 확인하고 싶으셨나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시험과 면접은 정말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과정이다. (한국어 강사는 면접과 시강이 필수라 여전히 나는 지금도 그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래도 어찌어찌 합격 문자를 받고 하고 있던 일을 조금 정리하면서 대학원을 다닐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지금도 이 길을 가면서 한국어 강사를 왜 시작했냐는 질문을 불쑥 받는 경우가 많다. 어떤 특별한 계기나 결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냥 막연히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던 것 같다. 다문화센터나 대학 어학당, 또는 외국에서 체류 시 할 수 있을만한 직업으로 한국어 강사가 가장 현실적으로 접근가능했던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내가 이일에 조금 지치더라도 학생들과 있는 것을 좋아하는 터라 쉽게 회복이 될 거라고 막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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