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된 지 며칠 차
방학은 학부 강사에게는 미뤄둔 것들을 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다. 그렇기에 기다림도 그렇고 실제 방학이 되면 하고 싶은 것을 하기에 바쁘다. 무언가를 더 한다는 의미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하거나 멈춤을 의미한다. 그래서 요즘 나는 도서관을 다니고 있다. 시립 도서관을 다니면서 보내는 요즘 나의 일정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그냥 도서관 가방이라는 이름을 붙인 초록색 배낭을 현관에서 메고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간다. 편한 운동화를 신고 빵이나 떡 하나를 챙겨 급하게 나간다. 지금 못 나가면 또 집에서 허송 시간을 보내는 것을 잘 알기에 부랴 부랴 급하게 나간다. 학기가 아닌지라 무언가를 놓치고 나가도 불안하지도 않다.
그렇게 도서관 구석 자리에 또 다른 집 하나를 짓고 하루를 머무른다. 그 집은 옥외 공부방 같은 느낌으로 보면 된다. 제이팝을 들으면서 노트북으로 여러 정보를 서치 하다 결국은 일본어 공부나 한국어 자료를 찾게 되는 거의 비슷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이럴 때 나는 나의 직업과 이런 하루가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남편이 이런 일정을 도와주고 있다. 출근하면서 나를 도서관에 내려주고 퇴근길에 나를 데리고 집으로 간다. 일상의 패턴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좋은 것 같다. 아침밥을 샐러드와 치아바타와 치즈, 요거트와 콩으로 정해 먹은 지가 꽤 되었다. 먹는 것, 입는 것, 일상을 단순한 패턴으로 만드는 중이다.
이제 바쁘고 살던 젊은 시절이 다 지난 우리에게 삶에서 본질만 유지하고 덜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부부이지만 서로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스스로 단단한 삶의 틀을 가지려 노력 중이다. 며칠 전 찾아온 조카가 "부러워요.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해서 "각자가 다 다른 삶이고 너네도 너네에 맞는 방식을 찾을 거야"라고 했다.
그 나이에는 모른다. 앞으로 어떤 경험과 삶을 마주할지 나도 그렇게 지나온 시절 두렵고 거칠고 무모하고 맹랑했던 젊은 시절 이제 이렇게 나이가 들고 보니 나는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때는 오만했고 뭘 몰랐다. 그렇다고 지금 무언가 많이 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심스러운 태도와 내 생각이 모두 맞다는 오만한 생각을 안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제는 내 생각이 틀리고 맞는 게 중요하지도 않다.
며칠 전 공부방을 정리하다 보니 나의 과거가 나타났다. 열심히 공부하고 두려워하던 흔적들 수업 준비를 하면서 끄적이고 모아둔 자료들 그 모든 것들이 지나온 나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버렸다. 모두 읽은 후에 하나씩 버리고 정리했다. 다 알아서가 아닌 쌓아 두지 않고 더 배우고 또 쌓으려고 버렸다. 자료도 많고 중복된 것도 많았다.
정리하지 않으면 또 모을 수 없다고 여겨 모두 버리고 다시 세팅하려는 마음으로 필요한 것만 남겼다. 방 안이 환해졌다. 그리고 개운해졌다. 어느 책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으면 청소를 하라고 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한 번 멈춤을 행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정말 필요한 일이다.
동계 수업의 마감을 또 앞두고 있다. 그게 끝나야 진짜 일이 끝나는 것이라 완전한 학기 마감은 아니지만 이미 다음 학기 수업 준비의 밑작업이 끝났다. 어릴 때부터 숙제를 해야 마음이 편한 나는 늘 미리미리 일을 하는 편이다. 그게 같이 일하는 분들에게 조금 피곤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게 나의 속도이다.
그래서 약속도 일정도 잡지 않으려고 한다. 그게 있으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거나 압박이 있다. 지금 이 방학에서 이런 게 없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좋다. 도서관에서 이렇게 글도 쓰고 음악도 듣고 공부도 하면서 일상을 담백하게 보내는 요즘이 너무 좋다.
다음 달부터는 영상을 찍을 거고 유튜브도 여름 방학까지 일정을 미리 예약하고 수업 준비를 마칠 것이다. 내가 생각한 일정을 모두 마무리하고 여유 있게 다음 학기를 맞을 생각이다. 나는 여유 있는 이런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리고 소세키의 '고고로'를 다시 읽을 생각이다. 원서로 읽고 싶은데 언제쯤 읽을 수 있을까? 싶다.
그리고 요즘 여기 와서 일본 소도시 여행책을 찾다 보니 다카야마라는 작은 교토와 시라카와고, 나고야, 시즈오카 등 주부 지방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청주에서 나고야로 들어가 다시 나오는 코스로 여행을 준비하려고 한다.
홋카이도는 이제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에 가 볼 생각이다. 겨울에 가 본 곳들을 다른 계절에 가 볼 생각이고 규슈는 일주를 했으니 일단은 패스, 도쿄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남편과 그곳에 있는 경험 하나를 계획 중이다. 오키나와는 내 취향이 아니고 대신 클럽메드 이시카키는 가 볼까 등 이렇게 여행을 계획하고 돈을 벌고 학기 중은 열심히 달려볼 생각이다.
언젠가는 일본의 모든 곳을 다 가볼 수 있지 않을까? 나의 꿈은 일본 전 지역을 가 보는 것이다. 꼭 그 희망을 이루길 바란다. 그리고 내 옆에 나의 남편과 추억을 만들기를 바란다.
--도서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