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고 싶지 않은 아이& 말하고 싶은 아이

by 맑은샘

전화기 너머 준이 엄마의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준이가 학교에서 돈을 빼앗겼어요.”

내 목소리도 준이 엄마처럼 높아졌다.

“네? 누구한테요? 얼마 나요?”

“오백 원이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일학년 아이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이것뿐이 아니에요. 계속 괴롭히며 따라다녀서 준이가 학교 가기 싫대요.”


가만, 이건 큰 문제다. 돈을 빼앗긴 데다 지속적인 괴롭힘이라니. 준이는 우리 반 중에 가장 키가 크고 힘도 센 남자아이다. 파마머리에 부리부리한 눈매, 어디 한 군데라도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데 누가 그 애를 괴롭힌다는 거지?


나는 조심스럽게 준이 엄마에게 물었다.

“누구라고 얘기를 하던가요? 고학년 아이가 아닐까요?”

준이 엄마는 한숨을 쉬더니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준이가 대답을 안 하더라고요. 말하고 싶지 않대요”

준이는 그랬다. 가끔 말하고 싶지 않다며 입을 다물 때가 있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속상할 때, 화가 날 때는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입뿐 아니라 귀도 닫힌 듯 말도 안 하고 못 들은 척했다.


준이는 그날 학교에 오지 않았다. 엄마는 집에서 쉬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겠다고 했고 나도 학교에서 반 아이들에게 물어보겠다고 했다. 준이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학교에서 준이 얘기를 하기도 전에 별이가 앞에 나와 물었다.

“선생님, 준이 왜 안 왔어요?”

별이는 웃을 때 보조개가 예쁘게 보이는 여자 아이다. 친구끼리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가서 얘기하고, 말하고 싶은 건 참지 못한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은 집에 가서 다 얘기하고 집에서 있었던 일은 학교에 와서 다 말한다. 별이 주변은 늘 소란하고 가끔 오해가 생겨서 말다툼을 할 때도 있었다.


나는 별이와 반 아이들에게 준이가 어제 돈을 빼앗겼는데 혹시 본 아이가 있냐고 물었다.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은 놀라서 누가 그랬냐며 이야기하는데 별이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수업을 마치고 준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준이가 이야기를 하던가요? 우리 반 아이들은 준이가 돈을 빼앗기는 걸 본 아이가 없네요.”

준이 엄마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쳤다.

“준이가 겨우 말을 했는데 우리 반 여자라고 하던데요. 이름은 말하고 싶지 않대요.”


다음날 학교에 나온 준이와 이야기를 했다. 준이는 입을 꼭 다물고 바위같이 단단하게 앉아있었다.

내가 다가서서 준이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준이야, 많이 속상했구나. 지금은 좀 괜찮니?”

준이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선생님한테 말을 해주면 좋겠어. 그래야 그 애한테 너에게 사과하라고 얘기할 수 있거든.”

준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중얼거렸다.

“별이에요.”


별이? 문득 체육 시간에 본 게 떠올랐다. 운동장에서 놀이기구 이용법을 알려주고 자유롭게 흩어져서 놀이기구에서 놀도록 했다. 준이는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서는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미끄럼을 탈 때도 반듯한 자세로 타고 내려왔다. 그걸 본 별이는 준이 뒤로 가서 같이 미끄럼틀을 탔다. 별이는 엉덩이를 요리조리 흔들며 내려오더니 미끄럼틀 아래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에 준이가 고개를 돌려 별이를 봤다. 별이는 벌떡 일어나 웃으며 뭐라고 말을 하는데 준이는 서둘러 남자애들이 노는 정글짐으로 갔다. 별이는 또다시 준이를 뒤를 따라서 달려갔다.


나는 별이와 따로 이야기를 했다.

“별이야, 준이와 무슨 일이 있었니?”

“무슨 일이요?”

“준이가 너한테 돈을 빼앗겼다고 말했는데 그랬니?”

“네? 아니에요. 준이가 나한테 준 거예요.”

“얼마?”

“오백 원이요.”

별이는 그동안 참았던 이야기를 술술 쏟아냈다. 공부 끝나고 집에 가는데요. 준이가 보여서 같이 가자고 했어요. 준이가 아무 말 없이 미끄럼틀로 올라가서 저도 따라갔어요. 준이가 미끄럼틀 타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거든요. 준이는 미끄럼을 안 타길래 같이 미끄럼틀에서 잡기 놀이를 하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갑자기 준이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운동장으로 던지는 거예요. 왜 던지냐고 했더니 나한테 가지라고 했어요. 그래서 돈을 가지러 내려갔다 오니까 준이는 없어졌어요. 집으로 갔나 봐요.


다음날 두 엄마와 준이와 별이가 같이 학교에서 만났다.

준이 엄마는 별이와 별이 엄마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별이에게 물었다.

“별이야, 너는 왜 준이한테 같이 가자고 하고, 놀자고 했어?”

평소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던 별이가 어쩐 일인지 쭈뼛거렸다.

“준이랑 같이 놀고 싶어서요.”

나는 준이를 보고 물었다.

“준이야, 너도 별이랑 같이 놀고 싶니?”

준이는 말은 하지 않고 고개만 흔들었다.


준이 엄마가 대신 이야기를 했다. 준이가 학교에 오는 게 별이 때문에 싫다고 했단다. 남자애들이랑 노는데 자꾸 다가오고, 옆에 와서 말 시키는 것도 화가 났단다. 툭 치고 도망가면 여자라서 같이 때릴 수도 없어서 속상했단다.


나는 준이에게 물었다.

“그날 미끄럼틀에서 돈은 어떻게 한 거니? 돈을 뺏긴 거니 아니면 네가 집어던졌니?”

준이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다시 질문을 바꾸었다.

“준이야, 네가 돈을 집어던졌니?”

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이한테 주고 싶어서 준 거니?”

준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주고 싶지 않은데 준 거구나. 그래서 엄마한테 빼앗겼다고 말한 거구나.”

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별이 엄마는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별이가 집에 와서 준이 얘기를 많이 해서 둘이 사이가 좋은 줄 알았다고 했다. 별이는 늘 보이던 보조개 대신 엄마 품에 고개를 자꾸 파묻으며 울먹거렸다.

그날도 준이는 말하고 싶지 않아서 별이에게 아무 말을 안 했다. 그래서 별이는 잘 몰랐을 것이다. 준이도 자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준이가 미끄럼틀로 가니까 별이는 미끄럼틀에서 놀자고 하는 줄 알고 따라갔을 것이다.


나는 별이에게 물었다.

“그 오백 원은 어떻게 했어?”

“저금통에 넣었어요. 준이가 준 거라서요.”

아, 이런 미끄럼틀에서 돈을 주니까 자기가 좋아서 주는 줄 알아서 그 돈을 소중하게 자기 저금통에 넣었단다. 별이가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건가? 나는 준이와 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준이는 말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닫아 버렸고 별이는 좋아하는 자기 마음만 믿고 상대방 마음을 보지 못했다. 별이는 준이만 보면 말을 하고 싶어서 달려갔지만 그게 준이를 더 말하고 싶지 않게 만들었나 보다.


그 후 별이는 준이를 봐도 더 이상 쫓아가지 않았고 준이도 조금씩 자기 마음을 얘기했다.

가끔 준이가 말하고 싶지 않다고 입을 다물면 나는 슬쩍 준이 옆에 가서 말했다.

“준이야 말해야 알 수 있지. 말 안 하면 아무도 네 마음을 모른단다!”

그러면 준이는 고갯짓을 하거나 짧게라도 대답을 했다.

잘했어. 준이야!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다 보면 앞으로 준이가 더 잘 소통할 거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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