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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샘 Mar 22. 2023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름

나는 신홍균, 김익단 신랑 신부의 첫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내 이름을 ‘사숙’이라고 짓자 엄마 눈이 휘둥그레졌다. 넷째 딸도 아닌데 무슨 ‘사(四)숙’이냐며 첫아이니까 ‘지숙’으로 하자고 했다. 아버지는 생각 사(思) 맑을 숙(淑) ‘맑은 생각’이 얼마나 좋냐며 고집을 부렸다. 


엄마는 둘째 아이면 끝까지 막았을 텐데 첫째라 아버지에게 밀렸다며 나에게 두고두고 미안해했다. 엄마의 염려대로 나는 이름 때문에 아이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다. 

초등학교 때 내가 지나가면 짓궂은 남자애들이 외쳤다. 

“신사숙녀 여러분, 신사숙녀 여러분!”

예전엔 TV에서 외국 영화를 많이 했는데 ‘Lady and Gentleman’하는 말이 자주 나왔다. 번역하면 ‘신사숙녀 여러분’이었다.

 

6학년 때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사 갔다. 바닷가 근처 작은 시골 학교라 아이들이 순진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웬걸. 전학 간 학교에서도 놀렸다. 나에게 제일 먼저 말을 걸어준 아이랑 친해졌는데 그 애랑 둘이 가면 아이들이 이러는 게 아닌가? 

“신사숙녀 여러분, 안녕히 가세요.”

시골 아이들도 TV를 많이 봤나 보다. 게다가 나랑 친해진 아이 이름이 ‘안영희’였다. 


중학교 3학년 때 경남의 면 소재지 중학교로 전학 갔다. 담임은 50대 남자 선생님인데 나를 보자 피식 웃었다.

“사숙이라…….” 

교실에 들어가자 선생님은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얘들아,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는데 이름이 신사숙이다. 사숙이!”

강조하듯 내 이름을 말하자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자, 숙 자매들! 서로 인사 좀 할까?”

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떨리는 눈으로 선생님을 쳐다봤다.


“일숙아.”
일 분단에 앉은 애가 조용히 “네.” 대답했다.

“일숙이 쌍둥이 동생, 삼숙이.”

삼 분단에 비슷해 보이는 애가 또 “네.” 대답했다. 

난 왜 쌍둥이 이름을 일숙이, 삼숙이라고 했을까 궁금했고 설마 이숙이는 없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자, 숙아. 인사해라. 이숙.”

선생님은 신이 난 듯 목소리를 높여 숙이를 불렀다. 외자 이름인 숙이의 성이 하필이면 ‘이’ 씨였다. 


“자, 이제 사숙이가 전학 왔으니 다음엔 오숙이만 오면 되겠다.”

선생님의 말씀에 반 학생들이 모두 다 크게 웃었다. 어떤 아이는 책상을 두들기며 웃어서 나는 너무나 창피해 그대로 교실을 뛰쳐나오고 싶었다.

  

아이들이 내 이름을 놀릴 때마다 나는 아버지에게 따졌다. 어릴 적엔 학교 안 간다고 빨리 이름을 바꿔 달라고 했고, 좀 커서는 아버지 때문에 무슨 고생이냐며 지금이라도 개명하자고 했다. 아버지는 늘 같은 말로 나를 달랬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름이야. 더 좋은 이름 있으면 말해 봐. 바꿔 줄게!”

 내가 어떤 이름을 말해도 아버지는 ‘신사숙’ 보다 못하다며 코웃음을 쳤다. 

  “맑은 생각, 얼마나 좋은 뜻인데. 그래서 네가 이렇게 반듯하게 잘 자라잖아!”

아버지는 다 당신 덕이라는 듯,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말해 나를 기가 막히게 했다. 엄마는 옆에서 "아버지 돌아가시면 바꾸라"라고 소곤거렸는데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몇 년 전, 처음으로 내 이름이 멋지다는 얘기를 글쓰기 모임에서 들었다. 이름이 작가답다는 것이다. 사숙보다는 ‘신사숙’의 어감이 좋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 천둥 같은 소리로 외쳤다.

 “뭐라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얼마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원하면 얼마든지 내 이름을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도 이미 아버지만큼 내 이름에 익숙해졌다. 게다가 아버지의 예언처럼 맑은 생각을 가지고 잘 자라 초등학교 교사로 아이들과 함께 잘 지내고 있다. 게다가 ‘맑은샘’ 이렇게 브런치에 글도 올리고 첫번째 책도 내었으니 아버지 덕분이다. 


요즘도 가끔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나는 조용히 내 이름을 불러본다. 고집스러운 아버지의 사랑이 반백 년 만에 제대로 통했나 보다. 드디어 나도 내 이름이 점점 더 마음에 드는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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