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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샘 May 18. 2023

뭐가 닮았다고?

군대에 간 아들은 날벌레가 가장 무섭다고 했다. 180cm 넘는 건장한 군인이 되었는데도 모기나 파리, 하루살이를 보면 화들짝 놀랐다. 벌레 보고 놀라는 네가 더 무섭다며 아들을 놀렸지만 실은 나도 어릴 적 벌레를 무척이나 무서워했다. 


대학생이 되고도 여전히 벌레를 무서워하던 나에게 큰일이 생겼다. 교대 생물과 교수가 교과서에 나오는 모든 생물을 직접 만져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지렁이를 만지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나는 뒤에 있다가 슬쩍 안 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교수님은 마치 나에게 들으라는 듯 수업 시간에 지렁이를 보고 교사가 먼저 놀라면 되겠냐며 못 만지면 ‘F학점’이고, 다음 학기에 재수강을 해야 한다며 엄포를 놓았다. 


나는 절망했다. 실험용으로 갖다 놓은 지렁이는 환대가 분명하게 보이는 아주 통통한 녀석이었다. 남학생들은 나가서 지렁이를 만지고 어떤 애는 입에 넣는 시늉까지 했다. 여학생들도 용기를 내서 한 두 명 앞으로 나가 지렁이를 손가락으로 만지고 들어왔다. 남은 여학생이 몇 명 없었다.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지렁이를 만지다가 비명을 지르거나, 몸서리를 치며 도망가면 어쩌나 싶었다.

가슴이 마구 떨리고 울렁거렸다. ‘지렁이 해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만지면 되는 거잖아.’ 맨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나는 앞으로 나갔다. 지렁이는 속 살을 내보이는 것처럼 말갛고 미끈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지렁이에게 갖다 댔다. 


일 초, 이 초, 삼 초. 

나는 그 짧은 시간에 처음 느껴본 감촉에 놀랐다. ‘겨우 내가 이걸 그동안 무서워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를 옥죄던 무거운 족쇄가 벗겨진 기분이었다. 그 후로 나는 지렁이뿐 아니라 금붕어, 개구리도 만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던 나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 

     

소개팅을 할 때였다. 무척 어색한 자리였는데 유난히 긴장한 남자 근처에 파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파리는 그냥 거기 있으면 괜찮았는데 자꾸 내 쪽으로 이동했다. 상대방도 맘에 안 들고 이 상황도 짜증 나는데 파리까지 붕붕거리며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내 손은 공기를 퍼내듯 암팡지게 허공을 갈랐다. 


순간 남자는 자기한테 그러는 줄 알고 머리를 움찔했고,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남자는 내 손으로 들어가는 파리를 봤나 보다. “어, 어!”하며 손가락으로 내 손을 가리켰다. 난 내 손바닥의 떨림을 분명히 느꼈다. ‘하필 이 순간에 이걸 잡다니!’ 나는 0.1초 동안 망설이다가 의자 밑으로 손을 살짝 내리고는 힘을 뺐다. 파리는 동굴에서 탈출구를 찾은 듯 비실거리며 다른 쪽으로 날아갔다.

     

나의 능력은 날 벌레들을 아주 자연스럽고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확’ 잡을 수 있는 거였다. 이건 또 다른 능력으로 연결되었는데 모기나 파리뿐만 아니라 바닥에 떨어지는 컵도 잡을 수 있었다. 그럴 때 컵은 내 눈에 느린 동작처럼 보였다. ‘컵이 떨어져서 깨지겠는걸’ 하기도 전에 내 손은 정확하게 떨어질 지점에 가서 기다리는 식이다. 


이게 꼭 좋은 건 아니었다. 교사가 된 후 학교 대표로 다른 학교와 9인조 배구 시합을 할 때였다. 나는 교장 선생님과 함께 맨 뒷줄에 서 있었다. 서브만 제대로 성공하면 되는 부담 없는 자리였고, 누구도 내가 뭘 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상대 학교는 우리보다 배구를 잘하는 교사들이 많았고, 특히 공격수는 배구를 전공한 젊은 남교사였다. 우리 학교 선수들은 초반부터 주눅이 들었고, 노련한 매처럼 그걸 눈치챈 상대팀은 날카로운 스파이크 공격을 했다. 공격수는 내가 가장 만만해 보였는지 정확하게 내 자리로 엄청난 괴력으로 공을 내리꽂았다.


상대 팀은 제대로 공격이 성공했다고 환호하고, 우리 팀은 또 한 점을 내주는구나 실망하는 순간이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내가, 아니 내 손목이 재빠르게 어느 지점에 가서 기다리는 게 아닌가? 공격수의 공은 정확하게 내 손목에 떨어졌고, 나는 그 무시무시한 스파이크 공격을 막아냈다. 바닥에 떨어지려다 내 손목에 맞은 공은 그대로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바로 우리 팀 공격수 앞으로 말이다. 공격수는 이게 웬 떡인가 싶어 번개같이 튀어 오른 공을 그대로 상대편으로 넘겨 버렸다. 자기 팀이 이길 줄 알고 방어조차 하지 않던 상대팀은 제대로 한 점을 잃었다. 


내 손목은 순식간에 두 배로 부풀어 올랐고 우리 팀의 사기는 몇 배로 더 올라갔다. 하지만 끝내 뒷심이 부족한 우리 학교는 경기에서 졌고 나는 손목 근육이 파열되어 몇 달 동안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며칠 전 아들이 병원에 다녀왔다며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자기 방의 전등을 갈다가 떨어지는 전등갓을 잡다가 찔렸단다. 나는 너무 속이 상해서 외쳤다. 

  “그런 걸 왜 잡아? 떨어지게 그냥 두지.”

  아들이 웃으며 말했다. 

  “엄마 닮아서 그렇지. 그냥 나도 모르게 잡는다고!”

  나도 아들을 보며 같이 웃었다.

  “아, 그런 것도 닮는구나. 어쩌니!”

  이 능력은 내 대에서 끝나는 게 아닌가 보다. 아들의 아들, 아들의 딸, 손자 손녀의 아들과 딸까지 계속될 수도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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