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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상징과 신화이야기

숲길에서 만난 나무와 물 그리고 그림자

by 신선한량

나만의 상징나무를 그리다.


“여러 갈래의 나무가 모인 단 한그루의 큰나무 이기를

그 나무 가운데로 흐르는 물길이 이어져 가기를

인생의 갈림길처럼 두 갈래 길은

결국 다시 만나서 하나로 통하는 나무 숲길 이기를 바란다.”


몇 달 전 칼융 분석심리학 기반 그림자 워크숍에서 상징적인 그림 그리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종종 숲속 산책을 즐기는 터라 자연스럽게 숲길을 그렸다.

길 주위에는 풀과 나무를 그렸다. 양 갈래로 갈라진 길을 오르다보면 하나로 합쳐진다.

가만히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숲길이 나무 줄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물줄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길이면서 물줄기인 나무의 줄기에 우물 정자 모양의 표식을 넣는다.

아마도 나무의 옹이를 의도했으리라.

매끈하고 온전한 나무를 그리기보다 사연 있는 흔적 하나쯤을 남기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전체를 아우르는 배춧잎 한 장을 얹은 듯 테두리를 마무리 했다.

가까이서 보면 나무와 숲길과 들풀들이 보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전체가 한그루의 큰 나무다.

들여다 볼수록 신기하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의도한 듯 삶의 상징이 모두 들어가 있다.

‘나무’와 ‘물’ 그리고 ‘숲길’이 비로소 몸통을 드러낸다.

KakaoTalk_20250209_184557482.jpg '그림자 워크숍' 상징나무 그리기


숲길에 올라서다.


세상이 시키는 대로 착한 수순을 밟아왔다.

취직을 하고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 셋을 키우면서 희끗희끗한 중년에 이르렀다.

인생의 전환기마다 나의 조류를 탔다기 보다는 세상의 물살에 휩쓸려왔다.

남들 처럼 스펙을 쌓으면 어딘가에 당도할 줄 알았다.

직장 내 권력에 눈도장을 찍고 이미지 관리를 위해 가면을 써보기도 했다.

주요 행사가 열릴 때 마다 VIP 식사자리에 참석했다.

평점을 의식해 상사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날들이 있었다.

1년 동안 농사를 지은 결과가 손에 쥔 빈약한 나락이었음을 알았다. 그 다음날도 아무일 없는 듯 무거운 일상을 마주할 때마다 점점 닳아져 가는 듯 했다.


아들 셋을 키우는 일은 우리를 웃도는 일이었다.

처가의 손을 빌려야 하는 틈바구니에서 난 자주 찌그러졌다.

그 틈 속에서 숨을 쉬기 어려울 때면 숲길에 올라섰다.

나 혼자만의 세계 속에 빠져들었다.

그 안에서는 승진을 위한 서열경쟁도 타인의 평판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빠와 남편의 역할과 의무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상상과 몽상 속으로 도피할 수 있는 숨구멍이었다.

죽 이어진 길을 따라 양팔을 휘젓고 종아리에 힘을 준 채 꾸역꾸역 땅을 내딛는다.

올라가다가 내리막길을 만나기도 하고 중간쯤 넘어오니 등과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숨이 턱에 차오를 쯤 쉼터를 만난다. 잠시 주변 풍경속에 온 몸을 뉘여본다.

amy-burgess-zr1z9l8STvc-unsplash (1).jpg 사진: Unsplash의Amy Burgess


난생 처음 중년 사춘기의 여정


인생은 마치 숲길을 걷는 것과 같다.

삶의 오르막길에서 헐떡이다가 쉼터나 빈터를 만나면 숨을 고른다.

잠시 주변 풍광에 젖어보기도 한다.

내리막길에서는 돌아갈 곳이 있는 그리움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중년은 인생의 절정기라고들 말한다. 어느 시기에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있었다.

나이가 차서 오르막길이 만만해진게 아니라 늘 삶의 어느 단계나 오르내림은 반복된다.

혈기 왕성했던 그때보다 달라진 것은 쉴만한 여유가 조금 생겼다는 것 뿐이다.

삶의 전환기마다 점을 찍어왔다.

존재감 없던 학창시절의 반발로 대학생에 여기저기 설치고 다녔다.

민중가요 노래패에서 집회 시위가 열릴때마다 무대위에 올랐다.

대학교 공연.png 대학시절 민중가요 노래패 공연

군 제대 후 다큐 영상 제작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나의 세계관을 외부에 알리려 했다.

취직과 결혼에서 육아까지 쉴새 없이 파도를 넘어왔다.

중년에 들어서면서 인생 전체를 조망하는 배위에 올라 어디로 가는지 순풍이 어디서 부는지를 살폈다.

독서와 글쓰기는 망망대해에서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세상에 하고싶은 말을 적절한 방법과 채널로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종종 실체를 알 수 없는 그곳은 나를 끌어당겼다. ‘달콤씁쓸함’처럼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고향이고 그리움이면서 갈망이고 사무침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향해 나를 이끌어 가는 동력이다.


한참을 오르다보니 눈앞에 한 그루의 나무가 들어온다.

오랜 시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무의 불변함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정체성이라는 뿌리를 땅속 깊이 박고 이상이라는 하늘을 향해 가지와 잎을 뻗어나가는 힘에 있다.

잎이 변하지 않는 상록수는 오랜시간 푸르름을 속 깊이 간직한다.

그 후로 오랫동안 갈망이 만져졌다. 꺼진 줄 알았으나 매번 살아나 나를 불태운다. 삶의 의문이 들 때마다 내 안을 들여다봤다. 내 안의 실체를 알기 위함이다. 책을 들여다보고 글로 응어리를 풀어냈다.


나의 속도로 생장하다.


하지만 늘 지속가능한 성장만 한 건 아니었다.

사람은 성장을 하지만 나무는 생장을 한다.

무한 증식하듯 몸을 불리고 목표를 치달리는게 아니다. 자신의 한계와 특징을 알고 깜냥껏 진화한다.

필요한 만큼만 뿌리를 내리고 영양분을 섭취하며 쉼과 성장 그리고 회복의 리듬을 거친다.

중년은 인생 후반전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다.

‘나는 잘 살고 있나?’ ‘나의 무대는 어떻게 열어가야 하지?’

중년의 이슈를 책과 글쓰기로 풀어나가려 했다.

엄동설한에 차를 타고 서울로 교육을 가는가 하면

아내 몰래 교육 수강을 하다가 들키기를 수차례, 애정 작가를 섭외해서 직장 프로그램에 접목하기까지

수년을 그렇게 내 달려왔다.

진전과 성과가 없어 지칠만도 한데 놓을 수 없었다.

지난하고 더뎠다. 나에게 맞는 시기가 있고 더뎌도 적절한 속도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무는 그 지혜를 알려줬다. 타인의 시선에 매몰되지 말고 나만의 속도와 생애주기에 집중한다.

무한성장 하는게 아니라 나답게 전략적으로 생장한다.

나무.jpg 사진: Unsplash의niko photos


삶의 그림자

“나를 구렁텅이에 빠뜨렸던 것들이 나를 구원해준다.”

심리 상담가 이기도 한 김혜령 작가의 YouTube 동영상을 우연히 봤다.

항상 불안이라는 결핍에 시달린 그녀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탈피하기 위해 매달렸다.

교육을 받거나 책을 뒤적거리고 전문가를 찾아다녔다.

종국에는 불안도 나의 일부로 수용하고 오히려 좋은 에너지로 승화시켜 자신의 재능이 되었다는 요지였다.

칼융의 분석심리학에서 ‘그림자’ 용어가 나온다.

나의 열등한 결함 덩어리를 보듬다보면 오히려 나의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예민하고 관계에 취약한 나는 살기 위해서 종종 회피를 선택했다.

결혼 후 아내와 사소한 의견 차이로 시작된 갈등은 육아에서 정점을 찍었다.

아이와 아내 그리고 양가 부모님이 관련된 복잡한 구도속에서

내 의지만으로 어쩔수 없는 일들은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아이들.png
‘조금 더 수월하게 갈등 없이 지낼 수는 없을까?’
‘내가 조금 더 양보하고 이해하면 문제가 없을까?’
‘나는 왜 그녀처럼 논리적이고 대항력이 없을까?’


내향적이고 소심한 내 주위에 불안과 걱정이 나를 에워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해결의 접점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내 안을 들여다 보기보다 아내와 대척점에 서서 반박하기에 급급했다.

같이 맞불을 놓거나 화에 못이겨 물리력을 사용하기도 했다.

나는 더욱 쪼그라 들었다. 결국 아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면을 봐야만 했다.

민감한 안테나는 그녀의 행동과 감정 그리고 정황을 살피는 재능이었다.

글로 마음을 전하는 방법 또한 나만이 할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사태의 본질과 근원을 파고드는 힘, 갈등을 회피하려 해결책을 모색하던 끈질긴 자기 성찰

불안이 오히려 사태를 해결하려는 힘의 동력이 되어주었다.

일련의 내적 자원들은 나의 열등함이 아니라 강점이고 재능이었다.

뒤집어보면 완전히 다른 동전의 또 다른 면이었다.

그림자.jpg 사진: Unsplash의Rene Böhmer

흐르는 강물처럼


나의 부족한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려고 했다.

나의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려는 노력은 고유한 나의 모습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결핍을 채우려는 노력들이 성장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그게 나의 자연스런 삶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마치 강물이 주어진 삶의 결을 따라 굽이치고 회돌아 나가듯이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꾼다.

천성적으로 누군가와 반하고 갈등을 오래 품고 있지 못한다.

안의 불덩이를 식히기 위해 수시로 물이 필요했다.

거부하고 포기하기 보다 다가서고 스며들면서 나의 본질에 다가가려 했다.

칼융은 ‘인간과 상징’에서 강조했다.

“진정한 치유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것은 나의 기질과 성향이 중심이 되었지만

이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나에게 온전히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아내의 잔소리는 몽상 속에서만 헤매이지 않게 했다.

많은 이들로 북적대는 처가의 문화도 사람의 온기와 진실을 마주하게 했다.

직장동료들과의 갈등은 회피만 하는게 아니라 때론 정면승부 하는 용기를 불러왔다.

부지불식간에 나를 치유하는 요소들이 주변에 있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많아지는대로 통찰을 건져올리고

깨지면 깨지는 대로 의미를 낚아채는 유연한 물이기를 바란다.

어느곳에도 잘 담기는 사람이기를 소망한다.

물.jpg 사진: Unsplash의Simon Caspersen


나의 상징과 신화


나의 상징의 키워드들은 ‘나무’와 ‘물’, ‘길’이고 마지막으로 ‘그림자’이다.

곰곰이 따져보니 이 모두는 일종의 나의 핵심가치 였다.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 하는게 아니라

신화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마치 나무들이 독자적으로 생존하지만 땅과 공기중에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공생을 도모하는 속성과 닮아있다.


어렸을 때부터 ‘주말의 명화‘ 속 할리우드 영웅 스토리를 좋아했다.

영웅은 ’슈퍼맨‘이나 ’육백만물의 사나이‘ 같은 능력자들도 있지만 대부분 평범한 소시민들에서 시작한다.

그들이 일상 속에서 우연한 기회로 상황을 맞닥뜨리고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한다.

우여곡절 끝에 조력자를 만나서 역경을 함께 딛고 결국 목적한 바를 이룬다.

무엇보다 역경 속에서 친구와 가족의 소중한 가치를 각성하면서

새로 거듭나는 모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할리우드 영웅영화.jpg 사진: Unsplash의Dev


통찰과 지혜 속에서 블리스와 같은 희열을 맛보기를 갈망했다.

그 여정이 마치 숲길에 올라선 나를 떠올리게 만든다.

길 위에서 만나는 ’나무‘와 ’물‘, 그리고 ’그림자‘는 세상의 보여주기식 가치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나만의 지혜를 가르켜주었다.

그게 나의 상징인 이유이기도 하다.


나무는 자리를 탓하지 않는 버팀과 강인함으로 자신의 생을 살아낸다.

그러면서도 주변을 시샘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땅속의 곰팡이들과 연결하면서 서로의 삶을 돕는다.

자기 생애주기에 맞는 속도로 자기답게 생장한다.

몸을 무한정 부풀리기보다 능력치에 맞는 성장을 도모한다.


물은 어디에든 잘 담기고 스며든다.

상대가 누구인지 간에 적절한 조화의 지점과 순간을 간파하고 상대에게 맞춘다.

그렇다고 자신의 본분을 잊고 맞추기만 하는게 아니라 본질을 기억한다.

상대를 변화시키려하기보다 상대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간다.

몸을 붕 띄워 나를 멀리서 바라본다.


그는 지금 자기다움의 여정에 올라있다.

이상주의자 이면서 몽상가인 그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은 예술가다.

자신의 삶의 아티스트 말이다.

떠밀리듯 지나온 과거도 지금의 색깔을 낼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된 자신의 일부이다.

국립공원 생태해설 프로그램 담당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해설사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시간들,

남편과 아빠 그리고 아들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나날들이었다.

휘청거리지만 쓰러지지 않고 버텼왔던 증거들이다.


자기다움을 향해


나의 고유성과 철학은 나다움에서 나온다.

나의 매력도 거기에서 나온다.

중년 사춘기에서 건져올린 것들은 대부분 세상이 부정적이라 말한 것들이었다.

’나홀로’가 편한 고독감, 왜소해서 우람한 체격을 키우려고 헬스를 하게 했던 열등감,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공부에만 몰두했던 살지 못한 반쪽짜리 삶,

존재감 없던 학창시절 그에 대한 반작용은 또다른 반쪽에 대한 갈망을 불러왔다.


하지만 그런 나의 어둠과 그늘은 삶의 여정 중에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고독의 힘으로 글을 쓰게 하고 나의 자원을 돌아보게 했다면

왜소한 열등감은 건강한 신체를 만들어 줬다.

기대에 부응하려던 공부는 자신에 대한 관찰과 탐구로 피어나고 있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일련의 몸부림이 나의 개성과 관점 그리고 고유함으로 드러나고 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런 흐름이 할리우드 영웅물처럼 나의 소명과 미션을 따라 가는 나의 인생스토리이자 신화다.

나의 결점과 그늘로 점철된 흑역사가 아니라 관점의 전환을 통해 나의 길을 열어가는 새로운 여정이다.

일상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맞딱뜨리는 이슈를 나만의 관점과 철학으로 다루어 통찰을 빚어낸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들과 삶의 지혜와 배움을 나누고 누린다.

오랫동안 배회하던 미운오리 새끼는 저 멀리 보이는 같은 무리의 백조들을 보고

자신이 우아한 한 마리의 결정체 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미션과 소명이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이자 나의 신화 이야기다.

오리.png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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