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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밈 May 16. 2019

진상민원백서 #1

To be continued...

#1. 반말하지 마세요


체납자가 찾아왔다. 다짜고짜 돈을 납부했다는 확인서를 들이민다. 그리고 하는 말.

“내 저번에 찾아왔잖아. 방금 돈 백만 원 냈어. 카드 압류 하지마!”


누구세요?


이렇게 되묻고 싶었다. 나는 그 체납자의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상담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안 그래도 고액체납자들 관리에 정신이 없고 그 밑의 체납자들까지 합치면 수백 명의 체납자들을 관리하고 있는데, 알파고가 아닌 이상 체납자 모두의 얼굴과 체납액, 상담 내용을 단숨에 기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관공서에 찾아왔으면 신분증을 주고 자신이 누군지 밝히며 무슨 사유로 왔으니 어떻게 조치를 해주길 바란다, 확인을 바란다 등등 말을 해줘야지! 다짜고짜 자기 할 말만 하면 어쩌란 말이야?!


당신이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신분과 목적을 분명히 밝혀주시길. 그리고 나이 어려 보인다고 반말 찍찍하는 것도 기분 나쁘다. 넓은 마음으로 그 순간 참아줄 수는 있지만 당신의 인격 또한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걸 드러내는 행동이라는 걸 알아주길. 그리고 압류하고 안 하고는 나의 일이지 당신의 일이 아니다.



#2. 양치기 민원인


까꿍! 고액체납자 한 명이 내 명단에 새롭게 또 이름을 올렸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그는 체납액 일부를 납부할 테니 압류된 재산을 해제해달라고 조른다. 절대 안 된다고 버텼지만 불쌍한 그의 사정에 팀장님과 협의하여, 일부 금액을 납부하고 특정일에 완납한다는 조건으로 해제를 해드렸다. 솔직히 그를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납부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는 있었다.


약속 당일, 그는 체납액을 납부하지도 않고, 내 연락을 받지도 않고,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압류를 하였고, 그분은 다시 조르러 찾아왔다. 뻔한 레퍼토리다. 이제 너무 지겹다. 난 바보같이 한 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양치기 체납자는 양X치처럼 또 한 번 약속을 어겼다. 그래, 믿은 내가 바보지!!


이런 일은 무수히 반복된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만. 솔직히 그 사정 알고 싶지 않다. 자기들이 우리 사정 봐주면서 사업하는 거 아니듯이, 우리도 체납 징수 업무를 하는데 모두의 사정을 봐주면서 할 수 없다. 세금 내는 거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 그래도 꿋꿋이 세금 다 내고 열심히 사업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돌부처처럼 내 할 일을 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인류애는 사라진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 특히, 사업자들. 착한 사업자도 있겠지만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악한 사업자들이거나, 자기변명만 가득하고 남 탓하기 바쁜 사업자들이다. 민원인과 감정 교류하고 친분을 쌓고 신뢰를 쌓는다? 지금 내 직무에서는 불가능하다. 내가 신뢰를 쌓으려고 손을 내밀면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그 손을 내쳐버린다. 그렇게 나는 사무적인 말투의 공무원이 되어간다. 내가 친절하게 대하면 할수록 나를 이용하려 하는 체납자들이 있기 때문에.




회사에서 일하며 언제 환하게 웃어봤을까. 사람들에 너무 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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