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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밈 Apr 25. 2019

4년째 타지 생활

이렇게 재미없게 20대를 보내다니

25살에 공무원에 임용되고 어느새 시간이 흘러 29살이 되었다. '아홉수, 20대의 마지막'이라고들 하는데 실제로는 아무렇지 않다. 20대 중반 어느 자락부터 내 나이에 몹시도 무감각해졌다.


4년 동안 낯선 도시에서 지내고 있다. 연고지와는 아주 가깝지만 심리적 거리감은 매우 멀다. 아직도 정을 줄 수 없는, 회색빛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회색빛 하늘을 보며 출근하고, 창밖의 굴뚝 연기를 보며 일하고, 역한 공장 냄새를 맡으며 퇴근한다. 물론, 사택도 바로 그곳에 있다. '아! 그런데 난 공장 직원이 아니라, 공무원이지!' 가끔 다시 깨닫곤 한다.


자동차를 산 것도 아니어서 기동성이 떨어진다.  퇴근 후에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은 제한적이다. 사택에 들어가서 자기소개서 쓰기, 이직 공부하기 혹은 좋아하는 책을 보거나 TV 프로그램 보기. 이렇게 수동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밖에 없다. 부지런 떨면서 버스를 타고 나가 필라테스 배워보기 등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퇴근하면 그럴만한 마음의 여력도 몸의 기력도 없다. 푹신한 매트리스 위로 쓰러지고 만다. '아- 나의 소중한 20대의 하루가 또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생각하면서.


가끔씩 동료들과 술 한 잔을 기울일 때도 있다. 잠시 술에 젖어 취하는 기분에 현실을 도피해본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회사 가십, 상사 험담, 진상 민원인 이야기. 밀려오는 부정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 때문에 술에 고꾸라지기 전에 마음이 먼저 고꾸라진다. 그래, 내가 있는 곳은 이런 곳이지. 이렇게 술 마실 시간에 공부를 더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동료들과의 약속도 점점 피하게 된다.


그렇게 스물여섯, 스물일곱, 스물여덟이 지나갔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회색빛 도시 어느 사무실 한편에 앉아 컴퓨터와 전화기를 만지며 용을 쓰고 있는 모습만 생각난다. 친구들, 가족들과 즐거웠던 시간들은 어느 곳에 묻혀버렸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365일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일만 하고, 쓰러지듯 방에 들어와 잠을 자는 내가 보인다. 나도 같이 회색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다. 주어진 일만 하는, 재미없는 회색 도시의 회색 인간. 뭔가, 슬프네.


그런 나에 대한 보상 심리로 매년 혼자 해외여행을 떠났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인스타 인플루언서인 외국인을 만나 같이 여행하며 유튜브 vlog 촬영을 도와주고 나도 영상에 나오기도 하였다. TV 프로그램 '비긴 어게인 2'로 포르투가 유명해지지 않을 시절, 그곳에서 EDM의 세계를 알려준 여행자를 동경하기도 하였다.


또한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방영되기 전, 궁전의 아름다움을 여유롭게 혼자서 느끼고 왔다. 스페인 한 바퀴를 돌며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프리힐리아나, 네르하, 말라가, 세비야, 마드리드에 발자국을 찍고 왔다. (눈치 보지 않고 연가를 5일 이상씩 써가며 혼자 떠난 여행 이야기도 나중에 자세히 풀어나가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 기회가 된다면 북유럽이나 캐나다에 오로라를 보러 가거나,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을 보러 가고 싶다. 꼭!




하지만 오랜 해외여행도 결국은 끝이 있다. 현실 도피성 여행이 끝나면 다시 회색 도시, 여기 낯선 타지로 오게 된다. 이 곳에서 나는 여행객도 아니고 그저 타지 사람이다. 돈 벌러 온 타지 사람, 단지 그뿐이다. 그토록 현실을 잊기 위해 낯선 도시들을 여행해왔지만, 정작 여기 이 낯선 도시에서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버린다. 처절한 현실 속에서는 여행할 때처럼  마음껏 웃지 못하고 사유하지 못하고 회색 인간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재미없게 시간을 흘러 보낸 것만 같아서 속상하다. 나름 그때는 하루하루 보낸다고 힘들었을 텐데. 왜 하루를 좀 더 소중하게, 즐겁게 보내지 않았는지 이제 와서 채찍질만 하게 되는 것 같다. 모든 하루가 완전히 즐겁고 행복할 수는 없고, 모든 하루를 내 의지대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어떤 순간은 죽을 만큼 괴롭고 힘들며,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한다.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를 너무 몰아세우지 않고 싶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 이때까지 재미없는 하루가 모여 있다고 재미없는 인생이 되는 건 아니다. 그 하루는 더 나은 날들을 보내기 위한 준비 기간일 수도 있고, 어차피 인생은 예측 불가능하므로 내일도 재미없을지 재미있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앞으로 더 기대되는 날들이 많이 있으니, 지금껏 잘 살아온 만큼 더 힘내서 살아갈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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