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혼자 여행 (feat. 포르투갈 8박 10일)
혼자 하는 여행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래서 연차 5일을 내고 포르투갈로 떠났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그저 오스트리아 교환학생 시절, 친구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고 온 후, 포르투갈이 그렇게 좋았다고 이야기하던 순간이 기억나서 결정한 것이 전부였다. 그곳에 무엇이 있길래 그토록 극찬을 했는지 궁금하였다.
여자 혼자 여행을 한다? 글쎄, 굳이 '여자'로서 여행을 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위험한 일은 남녀노소 당할 수 있으니까. 뉴스에 나올법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계속하다간 여행을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대신 '혼자' 여행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은 되었다. 혼자 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여러 개 시켜 먹을 수 있을까, 혼자서 예쁜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을까, 혼자서 큰 캐리어를 끌고 잘 찾아다닐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사소한 걱정과 고민들.
'어떻게든 되겠지. 혼자 여행을 하는 건 내 로망이었으니까' 그렇게 월화수목금 연차를 내고 나는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떠났다.
리스본에 도착해서 혼자 돌아다닌 첫날, 운명처럼 어떤 외국인 여자아이를 만났다. 그녀도 나와 같은 날짜에 포르투갈에 혼자 왔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그녀의 부탁에 처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리스본에 머무르는 일정도 똑같아서 어쩌다 보니 같이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리스본 근교 신트라로 같이 기차도 타고 가고, 백만장자가 만들었다는 헤갈레이라의 별장도 보고, 세상의 끝이라는 호카곶도 가고, 당시 유행하였던 '콰이' 어플로 더빙 영상도 찍으면서 함께 깔깔거렸다.
사실 머나먼 타국에서 혼자라도 괜찮았다. 캐리어를 집에서 끌고 나온 후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 기내식 주문할 때였어도, 구글맵을 보며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를 찾아갔을 때에도, 혼자 밥을 먹을 때도 다 괜찮았다. 그런데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보거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평화로운 순간을 누릴 때는 누군가가 간절했다. 나만 이런 좋은 순간을 느끼기엔 너무 아쉬웠다. 친구나 가족 혹은 그 옆에 있는 아무나라도 붙잡아 함께 이야기하고 웃고 싶었다. 혼자 있을 때는 갑자기 푸하하 웃지를 못하니깐.
역시 누군가와 공감하며 함께 있으니 혼자일 때보다 더 생동감이 넘쳤다. 1과 1이 각자 존재하면 둘 다 1이지만, 1과 1이 합쳐져 2가 되면 생각지도 못한 시너지가 나온다. 혼자가 아닌 둘일 때 '우리의 감정과 시간이 이렇게나 충만해지구나'를 느꼈다.
그녀는 장난기와 웃음이 많았다. 모로코인이다 보니 아랍어를 할 줄 알았고 파리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어 프랑스어도 능숙하였다. 스페인어도 혼자 독학하여 꽤 잘하는 편이었다. 더군다나 한국에 관심이 많아 한국인 친구도 몇 있었고 한국말 문장이나 단어들을 꽤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오빠, 라면 먹고 갈래?" (응???) 뭐 이런 것부터 "맛있다", "배고파", "언니" 등등.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이 멋져 보였고 또 귀여운 면도 많았다.
그리고 놀라웠던 건 그녀가 Vlog 촬영도 하는 유튜버이자,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무려 31만 7천 명인 인플루언서라는 사실. 길거리에서 혼자 말하면서 촬영하는 사람을 실제로 처음 봤는데 신기했다.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내 사진이 올라가면서 왠 모르는 외국인들이 나를 팔로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유튜브 영상도 같이 촬영하면서 찍었는데, 영상 속 내 모습이란 뜨악할 정도였다. 걷는 모습, 말투, 목소리 모두 다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정말 자기 자신을 촬영해서 올리는 사람들은 대단하다.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가다 보니 숙소 예약할 때 고민이 많았다. 저렴한 호스텔로 예약할까, 비싸더라도 편안한 호텔로 예약할까? 혼자 여행을 잘 떠나는 친한 언니에게 물어보니 이제 나이가 들어서 마음 편하고 몸 편하게 호텔에서 잔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포르투갈 여행에서 모든 숙소를 호텔로 잡았는데, 조금 후회하기도 하였다.
일단, 숙소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 '그래! 난 돈을 버는 직장인이니까!' 하고 호기롭게 호텔로 모든 숙박을 결제했지만 일반 호스텔은 2~3만 원이면 하루를 잘 수 있는데, 호텔은 그래도 8~10만 원은 지불해야 했다. 8박 10일 동안의 일정에서 거의 7~80만 원가량이 숙박비로 지출되었으니 타격이 컸다. 그리고 가성비 좋은 호텔을 찾다 보니 시내에서 조금은 떨어져 있는 곳에 묶게 되었다. 아무리 지하철역과 가깝고 시내와 몇 정거장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해도 시내 중심지에 주로 있는 호스텔과 비교해보면 밤마다 돌아갈 때 불편하였다.
그리고 아쉬웠던 점은, 호텔은 오롯이 혼자만의 공간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이면서도 완전히 혼자서 고립되는 공간이기도 한 점이다. 혼자서 여행하다 보니 호텔에서 가만히 있을 때면 고요한 방안이 좋으면서도, 가끔 몇 마디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그리웠다.
나와 달리 포르투갈에서 만난 그녀 Salima는 리스본 시내 중심에 있는 호스텔에서 10인실이었나, 남녀 공용 도미토리 룸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또 다른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배낭 하나 메고 세계여행을 떠난 Carlos. Salima의 카메라를 들고 자신도 유튜버처럼 해보겠다며 신나게 촬영하다가, 책을 좋아해서 길거리 서점에서 한참을 둘러보다가, 아시안 음식점에서 대통령 트럼프가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지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고, 멕시코 음악이 좋다며 들려주고,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의 편지가 쓰인 아주 특별한 여행 수첩을 가지고 있으며,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여행자들과의 만남을 추억하는 천진난만하고 멋있는 친구였다.
또 Salima와 나를 리스본 골목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자신이 워킹투어로 봐왔던 곳들을 보여주었다.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경치 좋고 하늘과 햇살이 예쁜 곳, 옛날에 마약소굴이었을 것만 같은 미로처럼 생긴 폐허 공간, 벽을 따라가다가 어느 집 문을 노크하면 누군가 문을 열고 노래를 불러주는 곳 등. 우리는 비싼 입장료를 내고 성에 들어가기보다 주변 골목을 돌아다니며 그 순간을 즐겼다. 신이 나서 워킹투어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Carlos와 비로소 진짜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 나와 Salima. 바다 앞 의자에 셋이 나란히 걸터앉아 햇빛을 받으며 버스킹 노래를 들었을 때는 너무 평화롭고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Gap Year를 갖는 사람이 잘 없을 텐데. 자신만의 신념과 의지로 열심히 모험하고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그 친구들과 다니면서 조금은 부러운 감정이 들었다. 그저 부모님, 선생님 말씀만 잘 들으면서 고등교육을 마친 후, 대학과 전공, 심지어 직업까지 내 의지대로 선택하지 못하고 부모님이 권유한 대로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물론 내가 원하는 길로 가기 위한 과정에서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껏 얼마나 내 의지대로 살아왔을까. 그때도 지금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이렇게 공허한 기분이 들까.
포르투갈의 다른 도시, 포르투(Porto)로 떠나기 전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날, 그들과 헤어지며 작은 선물을 주었다. 그때 Carlos가 깜짝 놀라 고마워하며 뜨거운 포옹을 해줬는데 역시 아메리칸 스타일! 나도 남녀 가리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누군가를 뜨겁게 끌어안아 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가끔 그립다. 완전히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 친구와 따스한 햇살 아래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광활한 수평선을 같이 바라본 때가. 혼자 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그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어쩌면 혼자 여행을 한다는 것은 진짜 혼자인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다른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이자 새로운 사람과 함께 시간을 나눌 수 있는 순간이다.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설레고 친근한 시간을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혼자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혼자 여행을 떠난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혼자여도 괜찮다. 처음엔 두렵지, 막상 떠나면 괜찮다. 꼭 그렇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