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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밈 Apr 07. 2021

24. 나만 붙잡고 있는 관계

미련 없이 가지치기할 때

고등학교 3학년 때 여러 무리와 어울려서 지냈는데 그중 한 무리에는 A와 B가 있었다. B는 밝고 웃음이 많았고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그래서 그 친구 옆에만 있으면 내가 엄청 재미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함께 있으면 소녀처럼 까르르거리고 웃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 고등학교 졸업 후, B가 갑자기 연락두절되었다. 만나자고 먼저 연락해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카톡을 며칠 동안 계속 읽지 않았고 설령 읽었다 해도 답이 없었다. A도 B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툰 적도 서로 마음 상할 일도 없었는데 그녀는 그렇게 사라졌다.


소중한 친구의 연이 끝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졸업하고 2~3년 지난 후였나, 그녀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을 때쯤 갑자기 그녀로부터 연락이 왔다. 의아하고 당황스러웠지만 친구가 또 사라질까 봐 아무 내색 없이 반겨주었다.




그런데 카톡이 잠시 이어지는 듯하더니 그녀는 답장을 하지 않고 이야기의 맥을 먼저 뚝 끊어버렸다. 그러고선 아무렇지 않게 며칠 뒤, 몇 주 뒤 심지어 몇 달 뒤에 연락 오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두세 번 카톡을 이어나가다 보면  그녀는 또 읽씹 하고 잠수를 탔다. 그땐 속에 천불이 날 것처럼 화가 다. 나를 만만하게 보나? 그도 그럴 것이, 카톡으로 대화할 때 내가 "요즘 어떻게 지내?"하고 물으면 그녀는 "그냥 잘 지내." 이 한 마디 뒤로 숨어버렸다. 그리고선 나에게 질문을 계속한다. 그럼 나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진실만을 말하는 약 '베리타세룸'을 마신 것처럼 술술 숨김없이 나의 이야기를 푼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2021년 3월 13일

B: 미니밈 며칠 전에 생일이었네, 생일 축하해!

: 웅 고마워! 오랜만이다. 잘 지내?

B: 웅 난 잘 지내ㅋㅋ 프사는 남자 친구야?

: 웅!ㅋㅋㅋ 연말에 결혼할 것 같아. 그전에 우리 한 번 봐야 되는데! 못 본 지 너무 오래됐다ㅠㅠ

B: (읽고 씹음)


2021년 4월 5일

B: 미니밈, 답장이 늦었지. 미안해ㅠㅠ 신혼집은 구했어?

: 아니야, 바쁜가 보다 생각했어ㅎㅎ 웅! 집은 구하고 있어! 곧 분양권이랑 보러 갈 것 같아.

B: 아 정말? 보러 다니는 것도 힘들겠다ㅠㅠ

: 웅 뭐 그렇지ㅎㅎ 요즘 뭐하고 지내는데?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있으면 보자~

B: (읽고 씹음) 


잠수를 탄 그녀로부터 몇 개월 뒤 다시 연락 오는 것이 거의 10년 넘게 반복되었다. 만났을 때 좋은 기억이 강했기에 화가 나고 답답한 마음을 꾹꾹 참아보려 했지만 마음속 뚜껑은 달그락거리며 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초반에는 구가 홀연히 다시 연락 왔을 때, 긴 장문의 카톡으로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러자 친구도 미안하다고 말을 꺼냈고 의문과 답답함이 속시원히 풀리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화해 아닌 화해를 했다.


하지만 그때 관계를 끝냈어야 했다. 자기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상대방 이야기만 줄곧 묻던 그 친구. 어렸을 땐 나에 대해 물어주니 신이 나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젠 알 것 같다. 그녀의 말들은 나에 대한 걱정과 진심에서 우러나온 이 아니라, 그저 정보를 캐내듯 묻는 수박 겉핥기식 질문들이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소통하는 기분이 아니라 발가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난 아직도 그 친구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뭘 하면서 지내왔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내가 물으면 대답하지 않고 숨어버리는, 수수께끼 같고 철벽 같던 친구였다.


화해를 한 이후에는 일본 오사카에도 여행을 같이 다녀왔지만 잠시나마 가까워졌다고 느낀 건 그때뿐이었다. 한국에 오고 나서 다시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도통 알 수 없는 그녀였다.


며칠 전 또다시 연락이 왔다. 몇 개월 전 자기가 먼저 '읽씹'을 시전 해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며 답장이 늦었다고 사과한다. 나는 보살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또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다음 주에 만나자는 나의 말을 읽고서 숫자 1이 사라졌음에도 며칠이 지나도록 답이 없는 그녀를 이젠 참을 수 없어 차단해버렸다.


다른 친구 A는 진작 B와 연을 끊었는데 나도 그때 같이 절연했어야 했다. 생판 모르는 남이 그랬으면 진작 상종을 하지 않았을 텐데, 옛날 좋았던 기억 때문에 억지로 관계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정작 끈의 건너편에선 아무도 잡지 않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만 멍청하게 끈을 부여잡고 속을 끓이고 있었다. 관계에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오래된 관계라고 가치 있고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 할머니는 오래된 물건 버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신다. 닳고 헤져서 더 이상 본래 쓰임새대로 활용 못하는 물건조차 절대 버리지 마라고 소리치시는 할머니. 그 모습을 보고 왜 저러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는데. 옛정 때문에 쉽사리 손을 놓지 못하는 할머니가 지금의 나와 다를게 뭐가 있나 싶다. '친구'의 본래 의미가 퇴색된 그녀는 더 이상 내게 '친구'가 아니었다.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본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나에게 짐만 될 뿐이라면 앞으로 함께 할 의미가 없다.


대학교 졸업하고 직장 생활한 지 어언 수년째다. 이제 거를 사람은 빨리 걸러야 한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신경 쓰기도 바쁜 이 세상에 뭐 좋다고 끊어진 줄을 부여잡고 있을는지. 나를 좀먹는 사람들을 정리하고 나면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나 손 내밀 것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면 분명 또, 좋은 사람들이 다가온다. 보낼 사람은 미련 없이 보내고 내 옆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더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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