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곰배령

by sinwolrang


- photo by sinwolrang -

새해 아침 핸드폰은 주마등이 돌아가 듯 빠르게 과거 속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감정의 파도가 넘실대던 조카의 결혼식을 지나 아이들의 흰 꿈들이 날리던 갯골의 갈대숲으로, 1317번째 가을을 불타오르던 반계리 은행나무와 낯선 끈적임으로 가득했던 여름 산노미야 밤거리로. 흐릿한 미각의 기억 속에 번들거리게 박제된 음식들과 아열대 원시림 속 이끼 냄새를 풍기던 자오시의 노천탕으로, 알거나 모 꽃과 나무들을 사람과 말들을 더듬으며 나는 어스름히 흐릿한 기억들을 쥐어짜며 한 방울 무언가가 흘러나오길 마른침을 삼키며 기다리고 있었다.


알레그로와 안단테로 프레스토의 속력으로 정물유화나 수채화로 잠시 잠깐 떠오르는 기억들, 기억하고 기억나지 않는 깨진 유리조각으로 분열돼 맞춰지지 않는 퍼즐 같은 기억들, 손가락 하나로 살아남거나 영원히 사라지는 화면 속의 네모난 세상들, 그러나 기어이 지워지지 않고 살아남아 강열하게 떠오른 기억과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나의 기억과 시선을 붙잡아 멈춰 세운 사월 같은 유월의 햇살로 일렁이던 곰배령. 봄의 제왕의 자비(慈悲)가 만든 초록실로 짜인 망토를 휘감은 곰배령. 그 곰배령이 물 위를 뛰어오르는 물고기처럼 기억의 호수 저편 은빛 비늘을 번뜩이며 빠르게 튀어 올랐다.


곰배령은 숲의 완성형인 극상림의 원시의 숲이다. 끓어오르던 지구가 식고 얼어붙기를 멈추던 그날을, 또 그만큼의 공허한 시간들이 어떻게 흘렀는지를, 숲을 탄생시킨 최초의 먼지와 물방울과 이끼의 냄새를, 배로 기거나 뛰어다니던 원시의 벌레와 곤충들의 얼굴을, 이 숲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감추고 싶었던 알고 싶었던 모든 비밀까지도....!


극상림의 활엽수가 빼곡히 자란 곰배령 고갯길을 걷다 보면 그늘진 바위옆에 마치 거인의 손이 땅을 움켜쥔듯한 모양의 화석처럼 희멀건 그루터기 하나가 보인다. 양수림 아니면 혼합림이었을 때 상록 침엽수였을까? 음수림 때 아니면 지금의 극상림의 활엽수였을까? 주변에 비슷한 그루터기가 보이지 않는걸 보아 활엽수였을 확률이 큰데, 아니면.... 우리의 할머니들 처럼 오래오래 끝까지 살아남은 침엽수였을 수 도 있다. 서어나무, 신갈나무, 거제수나무, 전나무.....?


찰나에, 빛 같이, 순식간에, 한순간에, 급박하게, 긴박하게, 긴급하게, 신속하게, 재빠르게....! 내가 아는 속력의 말들, 그 무거운 침묵과 공포와 허무의 말들을, 나는 증오하고 싫어하기로 했다.


나는 느리게 천천히 살다 또 그렇게 사라지고 싶다. 곰배령을 움켜쥔 이름 모를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이 세상에 나의 핏기 없는 손톱을 깊이 박고 오래오래 따분하리 만큼 천천히 사라지고 싶다. 모든 감각과 감정이, 영혼이 깃든 몸이 다 사라지고, 마치 회칠한 벽에 비친 시체 같은 그림자만 남을지라...! 그 누구처럼 전속력으로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나는 지루하게 사그라질 것이다

아스라이 저~ 너머

영원으로......................................................!



[에필로그]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사진들을 뒤로 돌려보다 새 해 첫 글을 쓰게 되었다. 작년 12월 딸의 권유로 시작하게 된 글쓰기가 한 달 사이 기대이상의 관심을 받았다. 누구를 의식해 쓰는 글이기보다 지친 나를 위로하고 격려 하기 위해 때론 주체할 수 없이 차오르는 감정들을 정리하기 위해 이 공간에 머물렀던 것 같다. 올해 개인적인 목표는 열심히 읽고, 쓰고, 운동하자이다. 브런치 작가님들 모두가 푸른 뱀처럼 지혜롭게 성장하는 을사년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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