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참 넓더라! [1/4]

N 22 º6'50'' / E 113 º33'42''

by sinwolrang

[프롤로그]

여행을 떠난다는 건, 미지의 세상을 향한 설렘과 불안감이, 마치 쌍곡선처럼 존재하는 감정적 일탈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차방정식 같은 변수가 적은, 단조로운 선형적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여행을 통해 직선의 기계적 삶이 아닌, 다차방정식과 같은 변수가 많은 비선형의 굴곡의 삶이 필요할 때도 있다.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일탈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직된 우리의 마음에 유연성을 조금이나마 회복시키고, 대부분 긍정적인 방향으로 우리를 변화시킨다. 그 변화가 항구적이진 않겠지만, 우리 삶에 유의미한 것만큼은 확실하다.

참고로, 이번 글에 여행지에 관련된 사진이나 지리적 명칭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독자들의 재미를 위한 것임을 밝힙니다. 구굴맵에 부제목에 있는 좌표를 입력하여 위치를 확인하거나, 4일 차 글에 힌트가 되는 글을 통해 확인이 가능합니다. (좌표: 22.0650, 113.3342)


[7.Jan]

몇 달 전부터 계획했던 가족여행을 떠나는 날 새벽, 그 어느 아침보다 빠르게 각성되어 오는 몸을 퍼뜩 일으켜 방을 나가보니, 아내는 잠을 설친 듯 근심의 그림자로 무거워진 눈꺼풀을 연신 들어 올리며, 전날 수차레 확인하며 싸놓은 트렁크를 반으로 잘라 또다시 삶의 거죽들을 들쳐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이가 들어 자기 확신이 사라질수록 몸은 점점 더 고달파질 거라는 걸 예감했다. 우리는 서둘러 짐정리를 마치고, 이동거리 약 2500km, 소요시간 약 12시간의 대 장정의 여행길에 올랐다. 공항으로 가는 동안 자동차 라디오에선, 어서 일어나할 일들을 시작하라는 듯, 자명종 소리 같은 지나치게 귀에 거슬리는 G음계의 기상캐스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북반부 한기의 핵에서 절리 된 한기가 우리 반도의 남쪽 끝 해안선까지 쏟아져 내려온다는 날씨예보를 듣는다. 우리는 그 한파의 경계를 벗어나 따뜻한 곳으로 가게 되어 다행이다라고 외치며, 이기적 안도감으로 배신자 같은 야비한 웃음의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우리는 박명의 겨울새벽 검게 반질거리는 고속도로를 평소보다 더 빠르게 달렸다. 해맑은 웃음 지으며 걱정과 설렘으로 가득한 제 키만 한 트렁크를 깔고 앉아, 먼저 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딸에게로……!


집을 나선 지 열두 시간 만에, 과학실에 매달려 있는 해골모양의 엉덩이가 짓 물러 터지기 직전, 우리의 몸은 첫 여행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마음은 벌써 모국의 공기와, 언어와 냄새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첫날에 묵은 숙소의 외형은 지중해 휴양지에 있을 법한 흰색 페인트로 도색된 고딕풍의 콘크리트 건물로, 1970년대 식민지 지배 계층의 휴양지 별장으로 지어져 사용되다, 호텔로 용도변경된 오래된 건물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관가 한 것이 있었다. 오래된 것들이 주는 익숙함과 편안함에 함정이 있음을...., 외부와 달리 호텔 내부의 모습은 중세 유럽의 수도원 같은 음침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마치 침입자를 경계하듯 무덤 같은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줄레주풍의 청색 무늬 타일들이 양측 하단부를 장식하고 있는 복도를 지나, 옻칠을 한 듯 반질거리는 검은색 객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우리는 아연실색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또다시 경악하고야 말았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반드시 악몽을 꾸게 될 것만 같은 당초문양으로 장식된 침대였다. 침대 네 귀퉁이마다 모기장 걸이용으로 보이는 촛대모양으로 조각된 긴 막대기가 꽂혀 있었고, 열면 지옥으로 들어갈 것만 같은 옷장과, 마녀의 유품 같아 보이는 역시 당초문양으로 장식된 거울장이 침대 옆을 지키고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흑사병으로 죽은 아이의 관짝처럼 보이는 궤짝 하나가 클로즈업되어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이 객실문과 같은 번들거리는 검은색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먹구름이 뒤덮어 곧 비난의 폭풍우가 쏟아질 것 같은 이 상황을 파악함과 동시에, 분위기를 반전시킬 문장하나를 고르기 위해...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 불 끄고 잠자리에 들면 어차피 모든 게 검게 보일 텐데.....!" 하지만 검은 뼈다귀들은 어둠 속에서 더 검게 반짝거린다는 걸, 난 알지 못했다.


엔틱스타일이 아닌 리얼엔틱 인테리어의 당혹감이 체 가시기도 전에, 아내의 표정이 다시 한번 일그러졌다. 이번엔 시각중추의 혼란이 아닌, 뇌 감각기관 중 나이가 가장 많은 고피질의 후각중추 감각이 문제였다. 인간의 감각기관 중, 생존과 깊은 관련이 있는 후각의 자극은 우리 뇌 속에 거의 영구적으로 저장된다고 한다. 하지만 낯선 냄새였다, 생전에 단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냄새, 냄새 기억저장소에 단 한 번도 저장된 적이 없는 냄새였다. 내가 아는 그 어떤 상식과 경험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마치 "시간이 썩는다면 이런 냄새가 날까!"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냄새였다. 난 즉시 아열대 건축물의 특징 중 하나인 허술한 알루미늄 창틀로 만들어진 발코니 유리창을 세차게 열어젖혔다, 하지만 난 이미 알고 있었다. 시간과 시간사이에 적층 된 이 냄새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방향제나 방취제로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차라리 발코니에 나가 별을 보고 자는 게 이 냄새로부터 벗어날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걸......!


당혹감에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발코니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육지 쪽으로 부드럽게 휘어진 해안선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 아열대 숲 너머로 사라지는 붉은 노을의 풍경을.....!

그때, 나는 흐릿한 웃음들이 조용히 내 등을 찌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열두 시간 만에 겨울의 황량한 검은 숲을 빠져나와, 어느덧 야생망고 나무들의 군락지와, 정원수로 심은 파파야 나무의 풋 열매들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얼어붙은 겨울 공기를 가를 수 있는 강한 생명력으로, 가래 낀 할아버지 목소리처럼 울어대던 날 짐승의 소리로부터 벗어나, 명상용 배경음악에 나오는 호리병 속 공명된 휘파람 소리로 지저 기는, 작은 새들의 평화로운 공간 속으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명상을 하게 된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우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건 어둠이 찾아오고, 놀란 투숙객들의 마음을 진정시킬 업무를 맡은 작은 새들이 업무를 마치고 둥지로 돌아간 뒤였다. 우리의 긴장감이 조금 잦아들자, 기다렸다는 듯 배고픔의 본능적 욕구는 거세게 아우성을 쳤다. 우리는 별점 하나 없는 호텔보다 오히려 평이 더 좋은 호텔 내 레스토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음식에선 호텔만큼 오래된 냄새가 났고, 다행히 음식은 지중해 해산물 요리의 깊은 맛이 났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는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