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한 短想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관하여_메릴린 로빈슨

by sinwolrang

브라이언 그린의 "시간의 종말"을 읽고 난 후 한동안 마음에 공허함의 검은 그림자가 깊고도 길게 드리웠다. 종국엔 우리의 몸이, 생각과 마음까지도 먼지가 되어, 빛조차도 존재할 수 없는 저 광활한 암흑의 우주를 떠다닐 거라는 진실 아닌 진실을 받아들인다는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간이 다른 물질이나 생명체와 같이 원소 입자들과 나선형 DNA 염기로 구성된 유기체에 불과하다는 주장엔 쉽게 동의할 수는 없다. 입자들로 구성된 우리의 몸은 필멸하겠지만, 우리 안엔 불멸의 다른 무언가가(영혼, 정신, 의식) 존재하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이 책은 나에게 인간이 불멸의 존재이며 존엄함과 경이로움으로 충만한 특별한 피조물임을 강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책을 읽다 보면 어떤 주장이나 사상이 서로 대치되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된다. 이번에 읽은 영문학자이며 소설가인 메릴린 로빈슨의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관하여"와 직전 읽었던 브라이언 그린의"시간의 종말"이 그러하다. 브라이언이 현실주의 과학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우주와 인간은, 여든이 넘은 인문학자의 깊은 통찰과 신앙의 관점으로 바라본 인간과 우주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물론 상호 견해를 같이 하는 부분이 일부 존재하지만 내 생각엔 동이 서에서 멀 듯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서로의 서사를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축적된 삶의 경험들, 끈질기고 집요하게 쌓아 올린 지성과 사상들, 신의 은총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담긴 이 책은 인문주의 신학의 관점으로 인간과 우주의 형이상학, 존재론에 대해 글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인문학 이론서와도 같은 딱딱하고 무거운 분위기 일색의 내용들, 많은 시간과 인내를 요하는 이 책을 다시 읽는다는 건 겁이 나지만(하지만 캐내야할 보석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평생 망각의 주기에 따라 반복해 읽어야 할 책임은 분명하다. 신과 우주와 인간 존재론을 다룬 대서사를 단박에 이해할 지성이 나에겐 없기에 일부 책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 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 글은 이 책을 읽으며 마킹해 둔 글을 내 생각과 함께 옮겨 놓은 것이므로 이 책에 관심을 갖는 독자는 상호 관심과 이해하는 내용이 다를 수 있기에 패스하시길 바란다. 종교적인 내용에 대해선 반론이나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으나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내용들이 주류이니 폭넓게 바라봐야 할 것이다. 끝으로 82세이지만 아직도 열정적으로 글을 쓰며, 하루하루를 경이롭게 살아가는 작가에게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뇌신경학과 다윈주의는 인간의 감정과 정신을 인과율에 따라 분석하고 실체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있는 건 특정 환경 속에서 뇌 속에 있는 신경다발들의 활성과 비활성을 관찰하는 게 다이다. 그들의 주장은 인간의 감정과 의식의 근원을 모두 알 수 있다고 하지만 일부를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인류의 오랜 의문으로 남아있는 인간 존재론에 대해 그렇게 단순화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인간은 은하와 은하, 항성과 행성들이 거대한 에너지로 물결치는 이 우주에 비해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인간은 이 우주를 경이롭게 바라보도록 창조되었지만 우리는 사사로운 일에 얽매여 집착과 불안 속에 살고 있다. 그리스도교 관점에선 우리가 실제 하는 상황과(우주), 인식하는 상황(사소한 일) 사이의 차이를 타락이라 부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쓰기를 예술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글을 쓰는 우리는 우리의 글을 작품으로 생각한다. 인류는 종말로 몰아가는 재난이 닥쳐 지하실에 숨어 살더라도 글을 쓸 것이며 도구가 없으면 머릿속에라도 글을 쓸 것이다. 문학작품은 그것을 접하는 이들의 경험과 문화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음으로 예술작품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정직한 정보와 지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해야 한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를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우리에게 인문학은 우주와 이 땅에서 인간이 얼마나 독특한 존재인지를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교인은 육체의 죽음보다 영혼의 죽음을 더 두려워해야 하지만 종교개혁가 장 칼뱅의 우려한 대로 유럽은 종교로 인해 피바다가 되었고, 무지성과 폭력으로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려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치를 잃어버렸다. 총 하나가 팔리면 하나의 총이 또 팔린다는 말이 있다. 피의 복수를 위해 종교가 동원된다면 어떤 종교이든 그 종교의 참 의미는 사라진다.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내가 옳다고 여기는 작은 섬들뿐 아니라 이 세상 전체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더 깊게 생각해 봐야만 한다.


하나님에 관한 앎과 우리 자신에 관한 앎은 상호적이다. 이런 생각은 칼뱅의 사상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존재론과 일치하며, 인간과 인간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우주의 중심에 있다. 여기서 인간의 특징이란 세상의 수많은 생명체중에 인간만이 유일하게 별의 움직임과 위치를 파악하고, 거리를 측정하고 속성을 파악하는 지적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칼뱅의 존재론은 배움과 탐구를 평가절하하지 않으며 무지함을 인간의 본질적인 장애로 여기 지도 않는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중요한 것에 대해 말하려 하고, 우리가 진심을 다해 들으려 하는 그 특별한 순간, 내가 그리고 우리가 품는 희망, 감동에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종교는 이 세상이 우리가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들만으로 가득하지 않고, 그 보다 더 크고 깊은 생명이나 의미가 있음을 직관하는 것이 본질임을 세상에 제시해야만 한다.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려면, 그 우주를 이해하려는 인간 존재도 함께 있어야 한다. 인류가 불가해한 점은 인류가 우주를 알고 싶어 하고, 인류가 어느 정도 우주와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류가 그 우주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몸을 이루는 먼지는 우주에서 왔다. 달리 말하면, 우주의 역사가 우리의 몸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우주의 본성에 가능성으로 존재했음을, 우리가 우주가 머금고 있던 잠재성을 표현한 것임을 의미한다.


언제가 우리는 암흑물질과 암흑 에너지를 이해하고 설명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를 어떻게 누가 썼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성육신, 십자가, 부활은 존재와 인간 본질에 관한 매우 강력한 진술이다. 인간 생명의 초월적 가치에 대한 심오한 주장이며 특히 힘없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의 가치를 옹호한다. 세례, 성찬, 예배는 이런 형이상학 존재론이 펼치는 전망에 참여하는 행동 들이다. "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세기1:27)" 이 구절이 곧 존재론이며, 형이상학이다.


과학과 종교 사이의 논쟁은 지금까지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우리의 논리는 일상을 설명할 때는 유용하지만, 가장 큰 존재(우주)나 가장 작은 존재(양자)의 차원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신앙은 우리를 더 깊은 질문들로 이끈다. 내가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신앙은 뛰어넘는다. 그리고 내가 신앙을 설명하려다 필연적으로 범하게 되는 불완전한 이해와 해석에 꺾이지 않을 만큼 견고하다. 예정론과 같은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 조용히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무지야말로 진리가 머무는 깊은 어둠이다.


과학은 신학의 소중한 시녀다. 과학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지만 동시에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도 보여 주었다. 과학은 신학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이 놀랍고 불가해한지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가장 불가해한 존재는 인간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이 깊은 의미에서 '인간적'이라면, 인간의 본성에도 그리스도와 비슷한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모든 인간의 생명이, 모든 인간의 삶이 순전하고 용감하며, 유일무이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이름으로 아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묘사하는 가장 탁월한 표현은 그분이 태초부터 있었고,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하나님이셨다는 것이다. 종교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일 너머 무언가가 더 있음을 건전한 직관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해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더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막아주는 것 같기도 하다.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두어야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여기서 작가는 배타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원주의적 신학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정신과 자아를 합리주의 관점으로만 해석하려는 것은 과거의 오래된 물리학으로 양자와 우주를 설명하는 것만큼 불가능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있을 수 없고 불가능한 것이 무엇일까? 과학의 관점으로 보면 답은 분명하다. 바로 우리다.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조차 모르는 것을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리고 실제 대부분의 것이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세계 너머에 또 다른 차원의 현실이, 실재가 있음을 안다. 이 실재는 우리의 이해력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모든 존재에 스며들어 있으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나 모든 면에서 강력하며, 우리 귀에 들리지 않고 우리의 지혜로는 어리석어 보이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에게 시간과 삶을 허락한다.


시계는 멈추고, 우리는 영원의 문턱에 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가 죄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분명 위대한 계시일 것이다. 은총이 진실로 중요하다면, 그건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궁극적으로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그분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반드시 살리실 것이다.


인간 예수는 삶으로 우리가 얼마나 성스러운 존재인지, 동시에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를 보여 주셨다. 우리가 지구 생태계를 지배하거나 생태계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 세상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지녔음을 보여 준다. 예수가 참된 인간이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기 위해 '사람의 아들'로, 인간으로 오셨고, 지금도 그 답을 찾도록 우리를 돕고 계신다.


이 세상에 한계와 경계가 있는 이유는 '이해할 수도 , 측정할 수도 없이 광대하고 혼란스러운 우주 가운데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서라고 칼뱅은 말한다. 놀랍게도 한계는 우리를 막아서는 벽이 아니라 우리가 더 높게 도약하도록 도와주는 지렛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논리학에서는 '어떤 것이 없다는 것은 완벽히 증명할 수 없다'라는 공리가 존재했다. 인간이 이 무한한 우주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면, 우리를 제한하는 한계는 사실 하나님의 섭리이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들은 바로 '나'라는 존재가 있기에 가능하다. '나'라는 경계가 있기에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은 한 인간이라는 유일하고 필멸하는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고, 어떤 내용을 지니게 될까? 어떻게 그런 존재가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예수는 인간이 겪는 모든 한계를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자아...? 하나님은 과연 자신의 본성에 반하는 활동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왜 악과 고통과 죽음을 허용하시는가? 예수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어려운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정말로 우리는 인간을 믿는가? 그리고 아담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크리소스토무스가 상상했듯 사랑이 통치하는 세상, 모든 이가 서로를 용서하는 세상은 실제로 믿음으로 산을 옮기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행동을 타락한 정의나 보복의 저울이 아닌 은총의 저울을 놓고 보아야 한다. 모든 성서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동시에 얼마나 위대한지를, 다른 무엇보다 우리는 당신(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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