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_양귀자
드디어 3월이다. 분명 후드득 창문을 두드리던 빗소리에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밤새 적막한 침묵 속에 어둠과 사투를 벌였을 커튼을 열고 창 밖을 보니, 세상은 분칠 한 듯 곱게 단장을 하고서 부스스한 나를 맞이하고 있다. 예고된 눈이었다. 다시 겨울로 돌아가는 건 정말 생각조차 싫었다. 다만, 분명한 건 3월의 눈은 겨울의 무관용과 맹렬함의 위용이 느슨해 보인다는 것이다, 한겨울 눈이 가지고 있는 바늘 끝 같은 쨍한 반짝임 또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것은 빠르게 소멸되어 스며들고 흐를 것이다. 3월의 눈은 잔뜩 움츠려 있던, 움트고 터트리고 깨어나야 할 자연의 모든 생명들에게 "이젠 그만 항복한다, 나도 이젠 지쳤다. 나도 그동안 많이 춥고 외롭고, 힘들었다." 이런 절망이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겨울의 전령으로서의 마지막 임무를 다할 것이다.
지난 며칠 성급한 봄 햇살의 따스함이 몽실 나를 막 들뜨게 하려 할 때 첫 장을 넘겨 읽기 시작했던, 겨울비가 아니라 이건 봄비라 애써 규정지으며 후반부를 향해가던 책 읽기를, 눈에 덮인 3월의 살풍경을 곱지 않는 눈으로 힐끔거리며 읽기를 마쳤다. 작가의 노트에서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모순]을 쓰면서 이 소설을 읽는 모든 사람이 전부 '첫 독자'이길 꿈꾸었다. 소설에 관해 유포된 어떤 독후감에도 침범당하지 않은 순수한 첫 독자의 첫 독후감을 많이 만나고 싶다' 마치 나를 앞에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사실 양귀자 작가님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작가님이 저리 얘기하니 '책에 대한 단상(短想)'을 쓰기가 좀 부담스럽다. 난 비평가들의 글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문학개론 이론서에나 어울릴 만한, 그들만의 전문용어를 난발한 체 마치 나와 같은 어리숙한 독자들을 가르치려 들기 때문이다. 기성 작가들과 우리가 쓰는 글이 작품이고 예술이 될 수 있는 건 단 하나의 요건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글을 읽는 이들의 독자적인 경험과 사회, 문화적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작품이고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로빈슨 여사님). 글을 쓴 작가가 의도적으로 방정식의 정답처럼 획일적인 반응을 목적에 두지 않는다면 (물론 작가도 그걸 원치 않을 것이다) 말이다. 만일 그런 책이나 글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최첨단 기능을 탑재한 전자제품 사용설명서와 같은 것일 뿐이다.
이 소설은 다분히 대칭적 구조의 인물(어머니와 이모, 아버지와 이모부, 남동생과 이종사촌들, 장우와 영규)들과 그들의 삶(사랑과 증오, 행복과 불행, 평탄과 굴곡, 이상과 현실)의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극단의 대칭적 인물들의 삶을 모순이라는 회색지대로 끌어들임으로 그것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 언젠가 이모의 "너 보다 우리 자식들을 더 사랑해서... 너한테 정말 미안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주인공의 이상은 사라지고 현실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모는 절대 내 어머니일 순 없다는, 비록 일란성쌍둥이 이모 일지라도 내 어머니가 될 수 없음을...! (사실 이 책의 주인공은 아마도 어머니일 것이다.)
이모의 평탄하고 감성적인 삶을 동경했고 어머니의 투박함과 그녀의 불행을 증오했지만 결국 소설 속 주인공은 어머니에게서 삶에 대한 투지를 차용하고 이모의 삶 같은 평탄한 현실적 삶을 살기로 선택한다. 그녀에겐 오랜 탐구 끝에 찾아낸 이상적 사랑이 있었지만, 현실엔 병든 아버지와 철없는 동생이 그리고 그 누구보다 불행하고도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가 있었다. 주인공이 선택한 모순적 삶은 결국 가족에 대한 사랑과 어머니에 대한 존경이 빚어낸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나의 서툰 해석을 양귀자 작가님은 공감해 주실지는 의문이다)
'행복하다고 마냥 좋을 것도 불행하다고 마냥 나쁠 것도 없음을, 우리는 언제든 모순과 손을 잡을 수 있음을 그게 인생이고 우리의 현실이고 삶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