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 백구

Bohemian Dog

by sinwolrang

8년 전, 봄...


나른한 아지랑이가 들녘마다 아득한 꿈처럼 피어나던 어는 봄날이었다. 오전 업무를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기숙사동 1층에 있는 구내식당을 향해 빠르게 걷고 있었다. 식당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짙어지는 음식 냄새가 강하게 식욕을 자극했다. 식당에 막 들여 서려는 순간 라면박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누가 박스를 여기다 내놓은 거야?" 하며 치우려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뻗어 박스를 잡으려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박스 안은 헌 옷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막 쪄낸 백설기같은 뽀얗고 하얀 강아지 두 마리가 불안한 듯 낑낑거리며 꼬물거리고 있었다.


점심도 잊은 채 박스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미 경이로움으로 대체된 배고픔은 더 이상 허기진 몸에 어떤 자극도 반응도 일으키지 못했다. 어미가 정성스레 보살핀 듯 흰 털에선 윤기가 나고 있었고, 몸통은 제법 통통하게 젖살이 올라 있었다. 흑진주처럼 알알이 반짝이는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충만해 보였고, 촉촉이 젖어 반질거리는 까만 코는 귀여운 하트 모양이었다. 아직은 소란한 세상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듯 접혀있는 귀여운 두 귀는 다소곳 머리를 덮고 있었고, 버들강아지처럼 매끈하게 뻗은 흰 꼬리는 제법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을 먹고 나오는 동료들이 박스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잔뜩 신이 나 소리쳤다." 아니~ 누가 회사에 강아지를 데려온 거야?" 관리부 여직원이 다가오더니 "아~ 식당 이 여사님이 집에서 데려왔데요~, 그 집 백구가 새끼를 여섯 마라나 낳았는데, 네 마리는 입양을 보냈고 나머지 두 마리는 사장님과 상의해 회사에서 기르기로 했데요." 조용히 그 여직원에게 물었다. "어미 젓은 다 뗬데요?" "네~, 이 여사님 말로는 어미가 힘들어할 정도로 젓은 많이 먹었데요. 아마 하루 이틀 낑낑대다가 곧 이곳에 적을 할 거래요~"


하얀 강아지 두 마리가 들어온 이후 이상하게도 회사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연휴를 코앞에 둔 사람들처럼 우리는 많이 들떠 있었다. 느슨히 벌어진 시간의 틈 사이로 온 통 강아지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이 부서 저 부서에 넘쳐흘렀다. 매일 사장님 지시사항이 떨어졌고, 하루가 멀다 하고 강아지 사료며 용품들이 속속 배달되기 시작했다. 반려견을 두고 있는 직원들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맘껏 쏟아냈고, 우리는 존경의 눈 빛을 반짝이며 그들의 말에 귀를 쫑긋거렸다.


그렇게 강아지들은 절대다수의 관심과 파격적인 복지 지원에 힘입어 회사 생활(?)에 잘 적응하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강아지들의 공식적인 이름이 없었다. 사내 공모도, 법적 소유주인 사장님의 일방적 작명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지금에 와 생각해 보니 각자의 취향과 주관적 관찰의 결과로 저마다 자기만의 이름을 지어 불렀던 것이다. 여러 이름으로 불렸지만 두 녀석을 구분하거나 소통하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만큼 두 녀석은 외모나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회사 재품명이나 어릴 적 자신이 기르던 개 이름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었지만, 난 덩치는 작지만 유달리 호기심이 많고 눈치가 빨랐던 녀석을 '똘똘이'로, 둔하긴 하지만 신장 발달이 월등했던 녀석을 '쑥쑥이'로 단순하고 직관적인 태명 같은 이름을 지어 불렀다.


그렇게 여러 이름과 주인을 갖게 된 강아지들은 만 평이 넘는 회사를 종일 뛰어다니며 일 년 만에 성견이 되었다. 자랄수록 폭발적으로 활동량이 높아지고 활동 범위가 넓어지는 그들을 지켜보며, 차량 통행이 많은 곳이라 행여 차에 치이진 않을까 모두들 노심초사했다. 급기야 사장님 지시로 널찍한 울타리 안에 녀석들의 집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만 평이 넘는 활동 반경을 서너 평의 공간으로 제약하자 녀석들은 무척 힘들어했고, 급기야 똘똘이는 탈출을 감행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 일을 계기로 회사에서는 낮에는 시야가 확보되고 모두가 예의주시해 지켜볼 수 있으니 풀어놓고, 해 지기 전 울타리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게 되었다. 그 이후로 퇴근 전에 녀석들을 울타리 안으로 들여보내는 힘겨운 일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녀석들은 지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문화선전대'로서, 온종일 회사 이곳저곳을 순찰하며 다니는 '경비견'으로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게 되었다. 그렇게 잘 지내던 어느 날 출근해 업무를 보는데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늘 쌍으로 천방지축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녀석들의 모습이 눈에 안 보이는 것이었다. 관리부로 찾아가 여직원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파이프(관리부에선 쑥쑥이를 그렇게 불렀다)가 밤마다 짖어대는 바람에 잠을 못 잔다고 기숙사에서 자주 민원이 들어왔었어요. 그래서 사장님께서 고민하시다가 아랫마을 이장님 댁으로 보냈어요." (쑥쑥이는 덩치에 비해 유난히 겁이 많았다. 그래서 밤마다 신경을 곤두 세우고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나도 짖어댔던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맥이 빠져 사무실을 나서는데, 강아지 때 종이박스에 담겨 처음으로 회사에 왔던 그 자리에 똘똘이가 힘 없이 웅크려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 이후 한동안 똘똘이는 풀 죽은 모습으로 쑥쑥이의 흔적을 좇아 회사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고 다녔다. 항상 깨끗이 비어 있던 밥그릇의 사료는 줄어들지 않았고, 식당 여사님들이 챙겨주는 소금기 빠진 고깃 조각만 이따금 받아먹는 듯 보였다. 똘똘이는 많이 우울해했고 회사 분위기 또한 덩달아 가라앉았다. 그때 난 기숙사에 지내는 이들에게 살짝 서운함 맘이 들었었다. "아니~ 왜~?, 밤에 쑥쑥이가 그렇게 심하게 짖어 대던가요?, 간식도 줘가며 잘 훈련시켜 보시지 그랬어요?" 따지듯 물었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오직 했으면 그랬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밤마다 쉬지 않고 짖어대는 개와 함께 지낸다는 게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시간은 우리는 물론이거니와 똘똘이에게도 망각과 적응이라는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 하지만 똘똘이는 쑥쑥이와 함께였을 때의 똘똘이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점프하 듯 앞다리와 뒷다리를 허공에 모으며 상큼 발랄하게 뛰던 모습은 보기 어려워졌다. 눈에 띌 정도로 활동량은 줄어들었고, 쫑긋 귀를 세우고 잔뜩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던 사랑스러운 모습은 영 사라져 버렸다. 밤에 무얼 하고 다니는지 낮 시간엔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고 종일 졸거나 잠이 든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장님이 " 직원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을 시간에 저 녀석은 매일 저렇게 탱자탱자 놀고 있으니~, 개 팔자가 상팔자여~, 오늘부터 저 녀석 이름을 탱자라고 부릅시다~" 그렇게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똘똘이는 드디어 '탱자'란 사랑스럽지만 불명예스러운 공식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후 관리부에선 혼선을 줄이겠다며 안내문을 사내 게시판에 내 걸었다. 탱자 흑백사진과 함께 [이름: 탱자, 간식 제공 금지, 탱자 관련 문의는 관리부로...]


구박을 좀 하긴 했지만 사장님은 은근히 탱자를 챙겨 왔다. 누가 보더라도 탱자는 정승집 개였다. 우리 누구도 탱자를 함부로 대하진 못 했다. 탱자는 실제적 권력 서열 2위 자리에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사료를 잘 먹지 않자 안쓰러운 맘에 여직원들이 사비를 털어 온갖 간식을 사다 먹였다. 그래서인지 녀석은 단조로운 맛의 사료에는 점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고, 시계도 볼 줄 모르는 녀석이 오후 4시가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기어이 과자나 빵 한 조각을 얻어 입에 물고 사라졌다. 정문으로 낯선 화물차가 들어오면 달려가 길을 막고 짖어대며 과자 부스러기라도 던져줘야 길을 열어 주었다. 일종의 통행세를 받아 챙겨 왔던 것이다. 그 악행이 전국에 알려져서 인지 요즘 회사를 방문하는 기사님들은 의례 탱자 전용 간식거리를 준비해 들어오신다. 초행이거나 미처 준비하지 못한 기사님들을 위해 출고 증명서 발급창구에 탱자 전용 간식 보관함이 놓여 있을 정도다.


그렇게 안하무인 격 권력자로 지내던 탱자가 어느 순간부터 인지 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노숙을 하기 시작했다. 겨울 양지바른 잔디밭에 제 몸이 반쯤 들어가게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자더니, 여름이 되자 기숙사 처마 밑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잠을 잤다. 비가 오는 날이면 물에 빠진 생쥐처럼 홀딱 젖은 채 돌아다녔고, 한겨울 눈 오는 날이면 주렁주렁 온몸에 얼음을 달고 다녔다. 봄과 가을엔 잡초 덤블이나 씨앗들을 덕지덕지 달고 다녔다. 하얗던 털은 털갈이할 때 잠시 빼곤 구정물이 줄줄 흐를 정도로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다녔다. 목줄을 벗어 던진건 이미 오래 전 이었다. 회사에 귀한 손님이라도 오는 날엔 난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 몰골로 손님 주위를 어슬렁거리면 열에 열, "떠돌이 갠가요?", "아뇨~ 저희 회사 갭니다." 이어지는 해명과 웃음으로 마무리되긴 하지만 혹 오해할까 늘 조심스럽다.


한 번은 걱정이 되셨는지 사장님 지시로 힘들게 탱자를 붙잡아 목줄을 걸고 동물 병원에 종합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었다. 하지만 우리의 우려와 달리 탱자는 '이상 없음' 소견서를 받아 들고 우리에게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동행한 관리부 직원의 얘길 들어보니 수의사 선생님이 "탱자는 보기에는 더러워 보여도 근육도 잘 발달해 있고, 영양 상태도 좋아 보입니다. 털도 촘촘하게 나있고 피부병을 일으키는 진드기나 기생충 감염도 없어 보입니다. 탱자가 싫어하면 억지로 목욕시키지 않아도 됩니다. 가끔 붙잡아 빗질 한 번씩 해주시고 정기적으로 검진받고 예방접종만 잘하면 크게 문제없을 겁니다. 그리고 밖에서 자는 것도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돗개들은 회색늑대가 조상입니다. 유전적으로 2중 구조 털을 가지고 있어 추위에 잘 적응합니다."


요즘 들어 탱자의 습성이 변하고 있다. 기온이 오르자 좋아하던 얼음 띄운 생수를 물그릇에 담아 내밀면 무시하곤 보란 듯 웅덩이에 고인 빗물을 마신다. 밥그릇 수북했던 사료는 동네 길 고양이들이 차지했고, 탱자는 멀찍이 앉아 물끄러미 신기한 듯 그들을 지켜만 본다. 정문을 막아서는 일에도 흥미를 잃기 시작했고, 대신 화물차가 들어오면 차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바퀴마다 킁킁 냄새를 맡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모르는 이들이 보면 폭발물 탐지견이나 마약 탐지견인 줄 오해할 정도로 꼼꼼하게 냄새를 맡는다. 아마도 차와 바퀴에 묻어오는 전국 각처의 다양한 냄새를 맡는 일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하다.


탱자는 오늘도 화물차 주위를 서성이며 바퀴를 따라온 냄새를 쫓고 있다.

파란 바다의 반짝이는 짠 내음을,

드넓은 들판에서 잡초와 곡식들이 익어가는 마른 냄새를,

깊은 숲에 잠든 순결한 바람의 냄새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피어 올린 비릿한 새벽안개 냄새를,

......................

7년 전 헤어진 단짝 쑥쑥이 냄새를.


요즘 탱자를 지켜보고 있자면 여러가지 의문이 밀려온다.

보헤미안이 된 탱자는 행복할까?

아니면,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싶은 걸까?

비록 울타리 있는 땅이지만 넓은 이곳을 답답해하는 걸까?

밤마다 노숙을 하며, 쑥쑥이와 숲 속을 거닐고 들판을 달리는 꿈을 구고 있는 걸까?

떠오르는 달을 향해 '우~우~' 하며,

몸에 흐르고 있는 조상들의 소리와 언어로 맘껏 부르짖는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가끔 탱자를 보며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눈앞에 주어진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버리고 오롯이 제 본능에 집중해 사는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마음은 보헤미안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지만 늘 현실의 벽 앞에 주저하거나 아예 벽 너머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존재의 빈약함과 허술함이 파도가 되어 하얗게 부서지며 밀려온다.


[에필로그]

이 글은 탱자와 함께한 소중한 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 정년을 앞에 두고 있는 요즘, 인생 가장 힘들고 어두웠던 지난 시간들 속에서 탱자에게 받은 위로와 웃음과 기쁨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보헤미안이 된 탱자야 고맙고 사랑해, 앞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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