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
바람이 마을과 산자락을 빠르게 가르고 지나가자 서쪽으로 열린 하늘에선 잿빛 구름과 먹구름들이 뒤 섞여 몰려왔다. 그 모습은 마치 하나의 다른 세상이 거대한 독수리 발톱에 매달려 검은 바람을 앞세워 날아오는 듯했다. "툭~툭" 나뭇잎 몇 개가 빗방울에 흔들리더니 이내 얼음처럼 차가운 비가 화살처럼 긴 궤적을 그으며 대지 위로 무수히 날아와 꽂힌다. 마른 흙먼지가 포연처럼 피어오르고 대지는 굶주린 짐승처럼 포효하며 비를 맞는다.
때 이른 폭염은 내 누추한 몸과 영혼까지 녹여낼 듯 강렬하고도 맹렬했다. 단 한 번 만이라도 좋으니 시원하게 소낙비가 내리길, 타들어가듯 말라가는 개망초와 나는 갈망하며 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누렇게 변색된 벽걸이 에어컨이 토해내는 역시 누렇게 퇴색된 쿰쿰한 차가운 바람이 없었다면, 난 이 찜통 속에서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더위를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는, 손에 들고 있었던 이 책 속에 무수히 피어오르며 사라지던 습지대와 템스강의 습하고 차가운 안개 때문이기도 하다.
''문학의 바다에서 나를 만났다.' 네 번째 작품은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다. 재앙처럼 닥쳐온 폭염 속에 읽기 시작한 이 책을 다시 시작된 장마 첫 빗줄기가 창문으로 들이치던 날 마지막 장을 넘겼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글 밥이 많아 읽어 내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런던 도심과 교외 습지에 있는 안갯속 마을에 살다가 돌아온 여행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책에도 계절이 있다면 여름이라고 할 만큼 변덕스럽기도 하며, 불쑥불쑥 인물들이 사건과 함께 등장하기도 사라지기도 한다. 한 소년이 여름 나무처럼 쑥쑥 자라나는 성장의 기운이 넘치는 책이었다. 다양한 등장인물과 섬세한 묘사, 한 사건의 인과관계로 구성된 플롯은 강한 흡입력으로 나를 책 속으로 빨아들였다. 각 장마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궁금해 사무실 책상 밑에 숨겨두고 눈치 봐가며 틈틈이 재미있게 읽었다.
한 소년이 행운처럼 찾아온 유산으로 인해 많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진정한 사랑과 삶의 가치를 깨달는다는 이야기다. 결국 의례적인 결말처럼 행운의 유산은 불행의 씨앗이 되지만 그로 인한 절망과 고통은 소년을 타인의 고통을 포용하는 인간으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고 그 역시 진정한 사랑을 베푸는 성숙한 인간으로(gentleman) 변화시킨다.
우리는 속으로는 동경하지만 겉으론 경멸하는 행운의 유산을(상속이나 복권 당첨금과 같이 내 노력과 무관한) 얻게 된다면 어떤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행운의 유산이 불행이 아닌 행복으로, 천박함이 아닌 위대함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런 행운이 우리에겐 요원하지만 말이다.
범블추크의 거만과 비굴한 그림자에, 조소 띤 내 그림자가 언뜻 겹쳐 보이는 건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하지만 그게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