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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별 Jul 1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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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인 적이 없었던 그의 소년에게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간 오후, 길가에 생긴 몇 개의 물웅덩이를 지나 너의 방으로 들어온 우리는 나란히 누운 채 낮의 최면에 몸을 맡겨. 나는 왜 며칠간 연락을 안 받았냐고 묻고, 너는 푹 젖은 목소리로 별거 아닌 이야기라며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열어. 네가 입을 여는 동안 방의 위아래는 반전되고, 영문 모를 물이 쏟아지며 세피아빛 사진 몇 장을 현실의 색감으로 채워. 네가 있던 곳에 생긴 건 물웅덩이. 그리고 그 너머의 무성한 푸르름. 네가 오랜 시간 길러 왔던 숲이니. 보여줄래. 나는 네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물웅덩이 안에서 너는 달려가. 쏟아지는 숲의 청록색 그림자와 쌓이는 비의 발자국. 너는 소년으로 달려가. 몇 번이나 부러졌던 파란 빛의 두꺼운 안경을 벗고. 세속적인 애인들이 하나씩 남기고 간 멍을 벗고. 너는 달리는 소년으로 돌아가. 운동회 때 배턴을 누구에게 넘겨줬는지 기억나니. 그날 찍은 가족사진에는 아직 아버지가 있었니.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도 엿볼 수 없던 기억 속으로 너는 계속 달려가. 요즘에는 초록색이 좋다고 했었지. 커다란 마당의 나무 주위를 뛰놀던 귓바퀴에서 미끄러지던 바람의 색도 초록이었을까. 너는 넘어져도 울 수 없던 소년. 다른 울음을 두 손으로 받쳐주느라 울어도 되는 유년을 놓친 가엾은 소년. 그랬구나. 그래서 너는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도 울지 않았구나.
물웅덩이 안에서도 울지 않으려고 너는 계속 달려가. 어딘지도 모를 숲의 출구를 향해. 나는 너의 방향 잃은 뜀박질을 지켜봐. 그랬구나. 너는 소년이었지만 소년이었던 적이 없었구나.
두 손을 물웅덩이 안으로 뻗어. 울고 싶었구나. 하지만 울 수 없었구나. 소년이라서 울어야 했던 순간에, 소년이라서 울 수 없었구나. 이제야 알겠어. 나는 너의 작아진 몸을, 떨리는 어깨를 만져. 지금까지도 너인 동시에 지금까지는 네가 아니기도 했던 소년을 끌어안아. 울어봐. 이 한 마디 말로도 너의 소년이 울음을 터뜨려.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표정으로. 거봐, 버티긴 뭐하러 버텼대. 내 앞에서는 괜찮아. 네 얼굴에서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아름다운 초록이 쏟아져 내려. 나는 새하얀 얼굴로 네 초록을 모두 마시고. 네가 울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줄게. 네가 나에게 보여준 물웅덩이 속의 숲. 그리고 기꺼이 내 손에 건네준 너의 소년.
소나기가 내리는 날에도 이제는 도망치지 않기를. 아무리 깊은 물웅덩이가 생겨도, 그 속에 또 네가 갇혀버린다 해도 나는 네 울음이 시작된 곳까지 몇 번이고 손을 뻗을 테니. 그건 내가 너를 위해 갖게 된 신비한 능력이니까. 다짐과 다짐, 약속과 약속, 유년과 유년을 겹치며. 너는 잠이 들어. 나는 네 머리를 어루만지며 노래를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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