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하지만 다신 못 갈 여행지
2020년 1월 1일, 쏟아질 것 같은 모로코의 별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1년 후 2021년 1월 1일, 나는 별도, 달도, 해도 보지 못한 채 새해를 맞이했지만 1년 전 그때의 아쉬움과 벅참은 바로 어제의 일인 것처럼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2019년 12월 30일 밤,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에서 모로코 마라케시행 비행기를 탔다. 난생처음 아프리카 땅을 밟기 전까지 내가 알던 것은 우리가 사하라 사막에 갈 것이라는 점, 겨울 사막은 얼 것 같이 춥다는 점, 운동화를 신고 사막에 가면 몇 달간 모래 때문에 고생할 것이라는 점이 다였다.
최소한의 짐만 들고 드디어 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어스름한 새벽. 여러 블로그 후기를 보고 시내로 나가 패스트푸드점에서 밤을 새울 계획이었던 우리는 공항을 빠져나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야 했다. 블로그에선 바가지 씌우는 택시 요금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강경하게 흥정하겠노라 다짐한 후, 마음과 다르게 쭈뼛쭈뼛 택시로 다가갔다. 하지만 택시 기사들은 쉽게 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욱 강경하게 흥정은 없다는 태도를 보였고, 공항 문도 닫힐 시간이 다가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흥정 없는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다행히 블로그 말대로 불 켜진 패스트푸드점이 있었다. 공항에서 핸드폰 유심칩을 살 계획이 흐트러진 우리는 간단한 요깃거리를 시킨 채 패스트푸드점 와이파이에 기생하며 시간을 보냈다. 새벽 다섯 시쯤 됐을까.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한 우리는 결국 계획을 바꿨다. 이곳에서 밤을 새운 후 바로 12시간 버스를 타고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가 별을 바라보며 새해를 맞이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밤샘 비행 후 긴장감에 뻣뻣해진 몸으로 졸음을 이기려니 도저히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설상가상 새벽의 어둠과 적막, 공포를 뚫고 사러 간 당일 버스표는 매진이었다. 당일에 바로 지낼 수 있는 숙소를 구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겨우 숙소를 구하는 데 성공한 우리는 해가 다 떴을 무렵, 숙소 체크인 시간까지 버티기 위해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한 시간쯤 졸았던 것 같다. 체크인 시간은 아직 남았지만 더 이상 카페에 있을 수 없던 우리는 무작정 숙소에 찾아가기로 했다.
어느새 아침이 찾아온 마라케시엔 차가운 새벽과 다르게 따듯한 공기가 도시를 감쌌다.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속을 지나 미로 같은 골목길을 걸으니 마침내 숙소에 도착했다. 작아 보이는 외관과 다르게 숙소는 훌륭했다. 급하게 구한 것 치고 더할 나위 없었다. 호스트는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방으로 안내해줬고, 따듯한 차와 빵도 대접했다. 우리는 옥상층 2인실을 배정받았다. 다홍색 벽지와 깔끔한 실내,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뻥 뚫린 옥상까지. 그 숙소는 단번에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다.
꼬질꼬질함을 씻어내고 부족한 잠을 채운 우리는 오후가 돼서야 느릿느릿 일어났다. 계획에 없었지만 마라케시 시장을 구경하기로 했다. 도시는 북적이는 사람들, 이곳 특유의 향과 다양한 길거리 음식으로 연말 분위기를 냈다. 우리는 이곳 전통 빵을 하나 사들고 미로 같은 시장을 구경하다 지쳐 어느 2층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리쬐는 햇볕 밑에서 상큼한 과일주스를 마시고 한가롭게 지나다니는 이들을 구경했다. 이색적인 풍경이 주는 낯 섬과, 여유로움이 주는 편안함을 충분히 즐긴 우리는 배를 채우러 다시 거리로 나섰다. 모로코 전통 음식을 먹을까 했지만, 우리는 어느 블로그에서 본 타코 맛집을 찾아갔다. 익숙해서 더 맛있는 타코를 먹은 후 천천히 숙소로 돌아오니 어느새 해는 모습을 감췄다. 쉬지 않고 달려온 1년이 어느새 단 몇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니. 밤하늘에 콕콕 박힌 별을 보며 누운 채 지나온 시간을 회상했다. 아쉬움과 허무함, 대견함, 설렘 같은 감정들이 뒤섞여 나를 휘감았다. 그렇게 아프리카의 모로코에서 나는 2019년을 보내줬다.
다음날 버스를 타고 사막에 가야 했기에 새벽녘에 눈을 떴다. 서둘러 채비를 마친 우리는 무사히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이제 1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약간의 걱정과 설렘으로 우리는 버스에 올라탔다. 도시를 벗어날수록 핸드폰 데이터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중간에 점심 먹은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자면서 보냈다. 어느새 해가 지고 더 이상 잠도 오지 않았을 무렵, 드디어 사하라 사막에 도착했다. 우리의 사막 투어를 책임질 핫산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의 차를 타고 사막 초입에 위치한 숙소에 도착했다.
어릴 적 '아라비안 나이트' 만화책을 즐겨봤는데, 핫산의 숙소는 그 만화책에서 봤던 화려한 성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한국인이 어찌나 많이 방문하는 곳인지, 그곳의 안내문은 한국말로 쓰여 있었고 숙소에 묶고 있는 대부분의 이들 역시 한국인이었다. 우리는 화장실 문이 없는 숙소를 안내받은 후 주린 배를 채우러 식당으로 내려왔다. 이제야 제대로 먹어보는 모로코 현지 음식은 생각보다 입에 잘 맞았다. 우리가 하루 종일 굶다시피 한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배가 터질 때까지 끊임없이 음식이 나왔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소화를 시킬 겸 올라간 옥상엔 마라케시보다 더 많고 반짝이는 별들이 우릴 반겼다. 청명한 밤하늘에 그렇게 많은 별은 처음 봤다. 끝없는 하늘임을 자랑하듯 막힘없이 쭉 뻗은 그곳엔 큰 별들이 셀 수 없이 박혀 있었다. 바라만 봐도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탁 트인 하늘. 그 밑으론 끝없는 사막이 보였다.
다음날 아침, 본격적인 사막 투어에 나섰다. 오늘 우리는 낙타를 타고 끝없는 사막 속으로 들어간 후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단단히 옷을 껴입고 이곳의 전통 의상을 걸쳤다. 수면 양말 두 겹과 슬리퍼까지 신으니 사막으로 향할 준비가 끝났다. 길게 줄을 연결한 낙타에 10명의 사람들이 차례대로 올라탔다. 알리라고 불리는 가이드는 우리를 모두 태운 후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맨 앞에 서 낙타를 끌었다. 처음 타보는 낙타에 조금 무섭기도, 신기하기도, 설레기도 했다. 몇 시간을 앉아 가려니 엉덩이가 조금 아프긴 했지만, 광활한 사막을 터덜터덜 걸어가는 낙타에게 고마워 꾹 참았다.
어느 정도 걸어오자 어느새 출발했던 숙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목적지 역시 보이지 않았다. 무인도에 떨어진 것처럼, 이 넓은 사막에 낙타 10마리와 11명의 사람 외엔 그 무엇도 없었다. 이런 새로움을 마지막으로 느껴본 것이 언제였을까. 스페인에 처음 도착했을 땐 환경이 바뀌었을 뿐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점은 똑같았다. 그렇기에 낯설어도 새로운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막 한가운데를 걷는 것은 전혀 달랐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아마 앞으로도 겪어보지 못할 새로움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걸으니 조금 무서워지기도, 온전히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벅차기도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그 밑에 펼쳐진 끝없는 사막. 나를 태우고 걸어가는 낙타. 오직 이 순간만 누릴 수 있는 진귀한 경험을 영원히 잊지 않고 간직할 수 있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