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명이 넘는 청중 앞에 서있을 때, 어떤 기분이 드나요.
저는 한국인들 앞에서 한국어로 무엇인가 발표하는 것엔 자신 있습니다. 내용을 정리하고 그대로 말하는 것에 큰 떨림을 느끼지 않는 편이에요. 선천적으로 작은 목소리를 크게 내려할 때 조금 힘들 뿐입니다.
그런데 스페인 사람들 앞에서 스페인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4년이 넘도록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저널리즘'이란 전공 특성상 대부분의 수업에서 발표를 해야 합니다. 이럴 땐 혹여 실수할까 싶어 스페인어로 대본을 써 통째로 외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럼에도 강단에 서면 주체할 수 없는 떨림에 연습한 것보다 한참 못 미치는 발표를 하게 됩니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하며 새로운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호세 마리아' 교수님은 미디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 어떤 이미지를 만드는지에 대한 수업을 맡았습니다.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기 앞서, 교수님은 한 명씩 강단에 서서 59초 동안 자신을 소개하도록 했습니다. 먼저 지원자를 받고 이후엔 출석 번호 순대로 발표를 해야 됐어요. 다른 친구들이 발표를 하는 틈틈이 저에 대해 어떻게 소개할지 스토리를 구성했어요. 아무래도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엔 쉬웠지만 제 발표 시간을 기다릴 때까지 요동치는 심장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제 차례가 되어 강단에 섰습니다. 50명이 넘는 사람들. 모두 익숙하지만 가깝지는 않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한편으론 좋았어요. 제가 누구인지, 대체 이곳에서 뭘 하고 있고 왜 이곳에 왔는지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으니까요.
막상 발표를 시작하니 기다리는 시간보다 떨리지 않았어요. 저는 저에게 '니하오'라고 인사한 적 있는 친구의 눈을 보며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말했고, 축구를 좋아하는 친구를 쳐다보며 '나는 축구 기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경청하는 이들을 한 명씩 쳐다보며 스페인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왜 스페인어를 배우고 이곳에서 살고 있는지 설명했습니다. 59초에 딱 맞춰 소개를 끝낸 것도, 이들과 저 사이에 있던 거리가 조금 좁혀진 기분이 든 것도 모두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소개를 마친 후 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호세 마리아 교수님이 저를 불러 세웠어요. 그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방금 그 소개, 혹시 한국어로 다시 해줄 수 있어?"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스페인 동기들 앞에서 한국어로 나를 소개한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제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벙 쪄있자 교수님은 다시 "우리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래도 한 번 한국어로 해볼래?"라고 말했습니다. 곳곳에선 웃음이 터졌고, 저 역시 당황스러운 웃음을 감추지 못했지만 알겠다고 했어요. 모국어로 59초 동안 이야기하는 것인데 어려울 건 없으니까요.
다시 타이머가 맞춰지고, 아까와 같이 저를 쳐다보는 이들을 한 명씩 훑으며 입을 떼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한 글자씩 내뱉는 저와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를 듣는 친구들 사이에 어색함이 감돌았어요. 더 이상한 것은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이었어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5초 정도 가만히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러면 안 돼!'라고 속으로 외친 후, 다시 말을 이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국어를 바로 내뱉는 것이 아닌, 아까 얘기했던 스페인어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말을 하고 있었어요. 이상하게도 문법이나 문장 구조는 하나도 맞지 않는 말을 내뱉었고, 자신 있게 친구들을 바라봤던 아까와 달리 제 시선은 허공에만 머물러 있었어요. 그렇기에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스페인어로 했던 이야기는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말이죠. 왜 그랬던 걸까요. 그들은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제가 엉망으로 말했단 사실은 모르겠죠. 그저 간간히 들리는 '스페인', '스포츠', '팬더믹'과 같은 단어로 아까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정도만 알 것입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발표를 마친 후 드디어 자리에 앉았습니다. 교수님은 제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후, 다른 친구들에게 제가 스페인어와 한국어로 말했을 때 어떤 차이점이 있었는지 물었어요. 친구들의 대답은 저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제가 한국어로 말할 때 더 확신 있고 자신감 있어 보인다고 했어요. 스페인어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지만 좀 더 기계적인 말투로 들렸을 겁니다. 제 스페인어가 외국인 억양이 심한 편이 아님에도 그들이 듣기엔 '외국인스러운' 발음이 있었겠죠. 반면 한국어로 한 내용을 모르는 그들에겐 생각 없이 내뱉는 저의 모국어가 더 자연스럽게 들렸던 것이죠. 본의 아니게 이들에겐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한 나머지 말 한마디 안 해본 친구들이 제 발표가 끝나자 엄지를 치켜세우기도 했어요. 떨떠름하면서 기분이 좋기도 하고 아무튼 이상했습니다.
저는 한국어를 한 명도 모르는 50명 앞에서 한국어로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너무 어색하고 당황스러웠어요. 쌍방 소통이 아닌 일방적인 소통임을 너무 의식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겐 자신 있게 들렸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발표가 끝나고, 수업이 끝나고도 그 상황을 곱씹어 봤어요. 저는 발표를 하는 입장에서 '나'라는 브랜드를 원하는 의도대로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스페인어가 더 편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선 발표자의 태도가 더 돋보였던 것일까요. 알게 모르게 스페인어를 할 때는 긴장감이, 한국어를 할 때는 자신감과 편안함이 보였던 걸까요. 내용에 상관없이 말이죠.
언제나 알맹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조금 촌스럽고 어색하더라도 스토리의 힘이 가장 셀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늘의 신기한 경험을 돌아보니, 스토리만큼 겉으로의 이미지와 분위기도 강한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이런 점을 알게 하기 위해 저에게 스페인어와 한국어 발표를 시킨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