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부터 정연이와는 나름 취향이 비슷했다.
그때는 재밌게 본 영화를 서로에게 추천했다.
왓챠피디아가 생기고선 파트너로 설정해 취향을 공유했다. 설정만 하고 열심히 활동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정연이와 친구가 되고부터 꾸준히 서로의 취향을 공유했던 것 같다.
스페인에 있을 때 정연이는 독일로 교환학생을 갔고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홀로코스트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때 우리가 같이 읽기 시작한 책이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정연이는 한국에서, 나는 스페인에서 택배로 책을 받아 같이 읽었다.
그러나 우리 둘 다 끝내지 못했다.
절반정도 읽고 몇 년에 걸쳐서 완독 하려 노력했으나 거의 6년째 완독 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할 때 정연이와 이런 얘기를 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우리 진짜로 책을 같이 읽자. 우리끼리 독서모임을 하자!
나는 2022년 11월 한국에 돌아왔다.
내가 스페인에서 삶의 방향을 고민할 때 울림을 줬던 책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정연이에게 추천했다.
우리의 독서모임은 그 책으로 시작했다.
2022년 12월 31일, 우리는 이수역에 모였고 마침 연락이 온 유정이도 자리를 같이했다.
유정이는 우리의 독서모임에 흥미를 보였고 바로 합류하게 됐다.
그렇게 우리는 삼대독자란 이름의 독서모임을 시작해 벌써 32번째 책을 함께 읽었다.
각자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1순위이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만나고 있다.
매주, 혹은 격주로 책을 읽는 독서모임이 많아 우리가 읽는 책이 다소 적을 수도 있으나
사실 이마저도 벼락치기하기 때문에 모두가 최선을 다해 어떻게든 모임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우리 나름의 규칙도 있다.
1. 돌아가면서 책을 선정하고, 책을 고른 사람이 발제문을 쓸 것
2. 발제문에는 질문 세 가지를 포함할 것
3. 모두가 완독 할 것
4. 1년에 소설은 다섯 권만 고를 것
소설에 제한을 둔 건 책의 두께로 선택하는 것을 지양하기 위해서다.
처음에 짧은 소설을 몇 번 하다 보니 모임 하루 전에 시작해도 빠르게 완독 할 수 있어
자연스레 짧은 소설을 찾게 됐다.
각자의 직업과 그에 따른 관심사가 다른 만큼
다양한 분야, 주제의 책을 골고루 읽는 것이 우리의 최대 장점이다.
소설 제한을 포함한 규칙은 이 장점을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장치다.
삼대독자 덕분에 나는 평생 안 읽을 법한 책을 많이 읽었다.
특히 삼대독자는 나에게 과학책의 재미를 알려줬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과학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꾸준히 과학책을 고르는 중이다.
정연이 덕분에 경제학 책도 몇 권 읽었고
유정이 덕분에 교양 에세이 책도 읽으며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됐다.
삼대독자가 아니었다면 내가 과연 그런 책을 쳐다보기나 했을까?
삼대독자는 나의 관심사를 넓혀주고, 다양한 세상으로 안내해주고 있다.
소중한 친구들을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히 만날 수 있다는 것도,
그들의 취향을 나눌 수 있다는 것도
한국에 돌아와 새 삶을 시작하는 나에게는 큰 부분을 차지한다.
가끔 스페인에 다시 나가거나 정착하는 상상을 할 때
그럼 삼대독자는 어떡하지?라는 생각도 여러 번 한다.
슬슬 각자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 이 모임이 희미해져 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꽤 오랜 시간을 더, 함께 책을 읽을 수 있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