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수능 필적 확인문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능이 끝나고 나면 확인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시의 일부 문구임에도 불구하고 한 문장이 주는 울림이 매우 컸다.
2000년에 19살에 첫 수능을 보았고, 2001년 20살에 두 번째 수능을 보았으니 20년도 더 아득한 사건이다. 2006년, 교직에 발을 내딛고 나서는 매년 수능을 보는 날은 1교시를 늦게 출근하는 덕분에 은근 즐거움이 느꼈던 하루의 일탈을 경험했다. 매년 마음 졸이며 디데이를 세며 공부하는 이 시대의 고3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에게 수능은 아득한 추억의 한 페이지 플러스 1시간 여유있게 출근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수능 필적 확인 문구를 읽는 순간, 수험생의 마음이 되어 또는 힘들었던 나의 어느 때의 모습이 떠올라 뭉클해셔 눈물이 핑그르 돈다. 이렇게 낭만적 문구를 넣으면, 나같은 수험생은 마음이 시큼해서 문제 풀 수 있겠어?
2023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 한용운 '나의 꿈'
2022 넓은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며 - 이해인 '작은 노래2'
2021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 - 나태주 '들길을 걸으며'
2020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 하나 별이여 - 박두진 '별밭에 누워'
2019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 김남조 '편지'
2018 큰 바다 넓은 하늘을 우리는 가졌노라 - 김영랑 '바다로 가자'
2017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란 하늘빛 - 정지용 '향수'
2016 넓음과 깊음을 가슴에 채우며 - 주요한 '청년이여 노래하라'\
2015 햇살도 둥글둥글하게 뭉치는 맑은 날 - 문태준 '돌의 배'
2014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 박정민 '작은연가'
2013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이며 - 정한모 '가을에'
2012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 황동규 '즐거운 편지'
2011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고 넓어진다 - 정채봉 '첫마음'
2010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 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
2009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 윤동주 '별 헤는 밤'
2008 손금에 맑은 강물이 흐르고 - 윤동주 '소년'
2007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정지용 '향수'
2006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 빛 - 정지용 '향수'
2024년도 수능 필적 확인 문구를 보고는 역시나 마음이 쿵했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살다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원망하지 말고 기다려라
눈이 덮였다고
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요
어둠에 묻혔다고
길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묵묵히 빗자루를 들고
눈을 치우다 보면
새벽과 함께
길이 나타날 것이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다
양광모 - 가장 넓은 길
수능이 끝이 아니었다.
수능은 시작이었다. 진짜 어른이 되는 시작. 그 시작의 문턱에 서 있는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응원이 되는 문구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매순간 길을 찾아 헤매는 나에게도 힘이 되는 시이다.
군고구마에 목이 메이다가 따뜻한 커피로 목을 축여주며 시집을 읽고 있는 내가 보고 싶다.
다시금 시집을 꺼내어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