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하게 헛헛한 오후, 너와 함께.
본가에서 '내 집'으로 돌아왔다.
무언가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곳
그리고 내가 먹여 살려야 할 누군가가 있다면 거기가 '우리집'이다.
십 년 전 가을, 지금 살고 있는 데에 마음을 붙이고 싶어 적당하게 이기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사는 것. 이 녀석과 살기 위해 일 년을 준비했다. 책을 읽고 다양한 영상들을 보면서 살아있는 존재와 함께 사는 게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한지 그리고 용기가 필요한지를 깨달았다. 물론, 그것조차도 설익은 상태였지만. 고양이와의 동거 첫날, 이 녀석의 눈물이 자줏빛이어서 얼마나 놀랐던지 앞뒤 재지 않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던 걸 생각하면 지금은 그저 웃음만 나온다. 고양이와의 동거 십 년. 이 녀석은 나와 함께 살아 행복할까를 생각하면 십 년 전 내 선택이 정말 '이기적'이었는지 새삼 몸소리를 친다.
오자마자 세탁기를 돌렸다. 일주일 치 수건을 돌리고 속옷과 두 번 이상 입은 옷들을 한꺼번에 돌리고 나니 너무나 일상적으로 흐르는 십이월 하고도 삼십일일 오늘이 우스워졌다. 적당하게 밀도감이 도는 헛헛함에 좁은 베란다 바닥에 앉아버렸다. 볕이 좀 남아서인지 엉덩이 쪽은 뜨듯한데 발끝은 시리다. 시린 발끝에 감도는 헛헛함이 심장까지도 전해져 오는 찰나, 같이 사는 녀석이 발끝에 코를 가져다 댄다. 녀석의 콧바람이 두어 번 발끝을 간지럽힌다. 피식, 웃음이 난다.
녀석의 털끝에 햇살이 주저앉아 일어나질 않는 듯하다. 내 몸에는 햇살이 잠시 쉬어갈 데가 없어 미끄러지듯 사그라들고 마는데 이 녀석의 털에는 뽀얗고 눈부신 햇살들이 잔뜩 묻어 녀석의 주변이 환하다. 이렇게까지 뽀얗게 빛날 수 있을까 싶게.
내가 너를 돌보려고 '우리집'에 온 게 아닌 듯하다. 너에게 돌봄을 받기 위해 내가 기어이 여기로 돌아왔다고 해야 옳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