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방주에서 비극적인 현실을 만난다.
고단한 삶의 구조는 무섭고 또 슬펐다.
뮤지엄 한미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있었다. 거기서 하는 작은 방주라는 전시를 꼭 가보라는 동료 선생님의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거의 십 년만이어서인가 아니면 내가 노쇠한 까닭인가. 길을 헤맸다. 젠장할...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가서 만난 첫 작품이 바로 ‘원탁’이었다. 짚으로 만들어진 머리 없는 존재들은 단 하나뿐인 머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로테스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기괴함은 내 몸 구석구석에 소름을 선사(?)했다. 그러다가 바로 내 앞에서 14호 인형(그냥 내가 정한...)이 파르르 어깨를 떨며 몸을 움직거리는데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무슨 짓을 도 나에게는 오지 않을 저 대가리를 차지하기 위해 버겁게 움직이는 인형의 어깨가 꼭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내 어깨를 닮았다. 저기 8호 인형은 머리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변 인형들의 욕망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구슬픈 어깨춤을 춰야만 하는 비극적인 연대 의식. 소름 끼치는 삶의 구조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그 위로 언제쯤 스러질지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검은 새 세 마리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닻은 머물러야 할 곳을 잃었고
항해를 돌볼 신도 죽었다.
방주와 이어지는 닻은 뜬금없이 높은 벽 어딘가에 박혀 버렸다. 머물러야 할 곳이 아닌 데서 정박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닻 없이 움직이는 배인지 알 수 없다. 무엇을 생각하든 우리의 목적지는 사라지고 없다. 적어도 내 눈에는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망망대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불편한 상황은 축 늘어져 죽은 것처럼 보이는 ‘천사’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지금 우리의 항해에는 문제가 있다가 일갈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대로 계속 우리의 여정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지 되묻는 것처럼 보인다.
마침내 방주는 항해를 시작한다. 거대한 노는 날개를 펼치듯 움직이며 성스러운 항해를 해내가는 듯하다. 물론, 이 성스러움 역시 얼마 가지 못해 장송곡을 연상시킨다. 열심히 움직이는 노 중에 몇 개는 움직임이 이상하고 저 방주의 ‘두 선장’은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열심히 노는 움직이지만 방주 자체는 늘 제자리일 뿐이다. 이 와중에 ‘무한공간’은 신기함 너머 우리를 끊임없이 뒤쫓는 감시자의 눈을 닮았다. 전시를 보는 내내 불편함이 가시질 않는다. 함께 온 사람들은 신기함에 탄성을 지르는데 나는 마음 한켠이 아리다. 다큐멘터리 카우스피라시를 보면서 느꼈던 동일한 불편함과 부채 의식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비극적으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는 영화를 찍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꽃이 지면 꽃이 피고,
꽃이 피면 꽃은 지고.
‘원탁’ 이후 만난 작품이 바로 ‘하나’였는데 이 작품은 팬데믹을 겪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헌화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리고 전시의 끝에서 만난 ‘빨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인간 의지의 희망 그리고 생명의 순환을 상징한다고 한다. 매시간 피었다 지는 꽃의 순환질서를 보고 있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노아의 방주에 태운 건 노아의 가족과 온갖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짝이었다. 그 생명들은 홍수가 물러간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했다. 그런데 이 작은 방주에 태운 존재들은 하나같이 기계장치들뿐이다. 생명 없이 차갑고 왠지 모를 그로테스크함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 심지어 흰 꽃과 붉은 꽃조차도 기계 장치의 작동에 따라 정확한 시간에 피었다 진다. 그래서인지 나는 인간이 모두 사라진 후 남은 차가운 도시 문명 혹은 인간성이 상실된 차가운 인간 사회를 재연한 것만 같아서 스멀스멀 차가운 서리가 옷 속을 뚫고 들어오는 듯하다.
추신. 피었다 지는 생명의 순환 말고도.. 또 하나 순환하는 것이 존재한다. ‘출구’. 끊임없이 열리지만 닫혀있는 문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나갈 수 없는 ‘출구’ 말이다. 과연 우리 삶의 구조는 더 나아질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