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적 소시민 Feb 14. 2023

서울 나들이, 국립현대미술관 (2)

여기 일어서는 땅, 임옥상 작가의 작품에서 땅의 숨결을 느끼며...

죽어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마음이란...



 정원 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웅덩이와 노파의 반신상도 임옥상 작가의 작품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다만 처음 봤을 때 저 웅덩이가 무엇이길래 노파는 저리 슬프게 웅덩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의아했었다. 축 처진 가슴에서는 젖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만 같고 늙어버린 주름은 슬픔으로 처진 눈을 더욱 애달프게 만든다. 예술이라는 것은 지식을 관통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모양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에 나오는 차문다 여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뉴델리 국립박물관에 있다는 차문다 신상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는 이 차문다 여신은 다른 힌두교의 여신들과는 다르게 뼈가 앙상하고 가슴은 말라버린 데다가 오장육부는 거의 사라진 채다. 아들들이 모조리 뜯어먹어 그리 되었다고 한다. 아들들에게 뜯어 먹히는 여신이라니... 작품에 나오는 노파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이며 검은 웅덩이는 썩어버린 땅의 숨구멍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해설을 들으니 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살을 내어주는 차문다 여신과 죽어가는 땅을 바라보는 어미의 얼굴을 하는 가이아가 오버랩되었다. 그래서인지 상반신만 있는 가이아의 모습은 더욱 위태로워 보인다. 스스로도 소멸되어 가는 것만 같은 아스라함이 느껴져서...



 다음으로 본 작품 ‘흙의 소리’ 역시도 가이아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거대한 인간의 얼굴이 땅을 베고 있다. 논밭의 흙을 가져다 만들었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날 것의 땅에서 채취한 흙의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안 그래도 거대한 인간의 얼굴이 땅을 베고 있는 듯했는데 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설명을 듣고 나니 참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은 어머니 가이아에게 무어라고 읍소하고 있을까. 아픔의 눈물에 그저 신음하는 소리 말고는 들려줄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의 신음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어머니는 어떤 심정일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다.



예술은 때론, 선지자적인 메시지 그 자체일 때가 있다.


 나를 압도했단 작품은 단연 ‘여기 일어서는 땅’이었다. 수평의 삶을 사는 땅이 내 앞에 자신의 몸뚱이를 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내세운 땅은 실로 놀라울 수밖에. 사람을 비롯한 동식물들과 인공적인 것들 그리고 다양한 기호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더욱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역시 흙 자체였다. 흙의 질감과 빛깔이 마침내 내게 말을 거는 듯한 경외감이 든다. 일어선 땅과 대면하여 이야기라도 나누라는 듯 작품 앞에는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그걸 직감하듯 사람들은 거기에 앉아 일어선 땅과 대면한다. 오랜 시간 앉아 흙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이러면 누군가는 실제로 저 일어선 땅이 말을 거냐고 묻곤 한다. 글쎄... 다만 나는 누군가가 건네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여는 연습을 하는 거라고 답한다.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작가에게 말을 건넨 땅의 이야기를 듣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에는 언제고 그 세밀한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미리 귀를 닦는 연습을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예술이란 한편으로는 선지자적인 메시지 그 자체일 때가 있다. 유물론적 세계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초월적인 메시지를 예술이라는 언어에 잡아두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술가는 선지자로서 우리 앞에 서기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서울 나들이, 국립현대미술관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