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건 풍경일까 아니면 사람일까
여행이 끝나고 몇 백 장의 사진들을 살펴보며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삭제'이다. 잘못 나온 사진들, 내가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은 사진들을 삭제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온 사진들을 지워나간다. 초상권을 침해하는 공적인 이유도 있지만 사적으로도 내가 원하는 풍경을 해치는 사람들이 나온 사진을 선호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여행자를 지향하지만 관광객에 가까운 이유도 이 때문일 듯하다. 정말 여행자에 가깝다면 사진기를 들기보다는 더 많은 '경험'을 쌓으려고 할 테고 그 경험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람과의 만남'에서 시작될 테니 말이다.
아랴시야마를 가기 위해 교토 거리를 100년 이상 달리고 있다는 작은 노면전차 '란덴 열차'를 탔다. 열차가 출발하면서 마을을 가로지르며 보이는 풍광에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한참을 감탄을 하며 사진을 찍어댄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니만큼 가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빠르게 흘러가는 바깥 풍경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꺼냈다가 기관사의 손이 보였다. 저 손을 어떻게 하면 안 나오게 찍을 수 있을까를 한참 고민하고 구도를 재다가 생각이 났다.
'나야 길어야 일주일 있다가 가는 관광객이니 이 모든 풍광들이 설레는 경험이겠지만 여기서 몇 년을 열차를 모는 기관사 분에게는 이 풍광이 당영한 일상의 조각일 수 있겠구나. 그리고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저 풍광들도 결국 여기서 정주하는 사람들의 손길이 만들어내는 거겠구나. 이 열차가 나아가는 것도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을.'
그러니 풍광과 함께 사람이 보였다. 특히, 여기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의 손길과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여행은 풍광과 문화에 취하는 걸 넘어 그걸 만들어내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의 삶을 경험하며 이해하는 과정이리라. 아라시야마로 향하는 란덴 열차 안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이었다.
그 유명한 응카페의 라떼보다
그걸 만드는 사람들의 바쁜 손놀림과
응카페의 커피를 먹으려는 사람들의 줄을 관리하는,
피곤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가
더 기억에 남는다.
기관사의 손길이 묻어나는 열차를 타고 아라시야마에 도착했다. 대나무숲은 고요하게 개운했으며 시원하게 흐르는 강줄기는 과감하게 청량했다. 따갑게 내리꽂히는 햇살에 정수리는 피가 날 듯 아리기도 했으나 곧잘 찾아오는 구름 덕분에 걸을 만했다. 사람들이 꼭 가야 한다고 추천해주어 굳이 ‘응커피’까지 걸어들어갔다. 그 작은 가게 바깥으로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굳이 줄을 서서 라떼 한 잔을 먹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던 찰나, 한 장면이 나를 그 줄로 밀어넣었다.
관광지이기도 하고 바로 옆이 자동차와 인력거가 다니는 도로였기에 무질서하게 줄이 이어지면 사고가 나도 나겠다 싶었나 보다. 경찰로 보이는 남자가 응커피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줄을 관리하고 있었다. 도로를 침범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안쪽으로 들여보내기도 하고 지나가는 자동차들에게 수신호를 보내기도 하면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앳되어 보이는 그 경찰은 고작해야 스무 살이 좀 넘었을까. 검게 탄 얼굴, 미간에 만들어진 고랑을 시작으로 땀은 줄기를 만들고 있었으나 그걸 닦아낼 기력이 없어 보였다. 심드렁하면서도 피곤함이 묻어난 그 앳된 경찰의 목소리를 나는 해석할 수 없었으나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응커피 통유리 안쪽으로는 바쁘게 손을 놀리며 커피를 내리는 또 다른 앳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유명한 응카페의 라떼는 저 사람들의 손길에서 완성되리라. 쉴 새 없이 만들어지는 라떼를 보며 숙연해진다. 정확히는 그 라떼에 깃든 노동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여행자 내지는 관광객인 내가 누리는 사치들은 이곳의 일상을 감내하며 노동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거라는 사실이 꽤 묵직하게 다가왔다.
기꺼이 그 줄에 들어가 섰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차가운 라떼 두 잔을 주문했고 마침내 그 유명한 라떼 두 잔을 내 손에 들었다. 한 모금 마시기 전 관광객의 줄을 관리하는 그 앳된 경찰에게 다가갔다. ‘아임 투어리스트. 디스 라떼 이즈 포 유. 땡큐 포 유어 하드 워크. 플리즈 인조이.‘ 당황하는 앳된 경찰이 어색한 듯 말했다.
“땡큐!”
나도 어색해서 무표정에 가깝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유어 웰컴.”
나는 아라시야마를 떠올리면 대나무숲과 거대한 강줄기 그리고 그 유명한 응카페의 라떼보다 그걸 만드는 사람들의 바쁜 손놀림과 응카페의 커피를 먹으려는 사람들의 줄을 관리하는, 피곤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가 더 기억에 남는다. 풍광이 아니라 사람이 떠올라서 다행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