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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적 소시민 Jul 20. 2023

교토에서 저녁을

미술관에서 철학의 길 그리고 은각사까지


이 포스터는 오늘을 위한 복선이었다.  


 일본에 도착하고 나서 지하철을 탈 때마다 계속 보게 되는 포스터가 있었으니 바로 루브르 전시회 포스터였다. 혼자 여행을 가게 되면 가급적 들르는 곳이 그 도시의 미술관이긴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미술관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루브르'의 스펠링에서 '러브'를 끄집어내 전시회의 주제를 기가 막히게 뽑았구나 싶어 감탄은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길 굳이 가보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헤이안 신궁을 나와서 블루보틀을 향해 가려는데 눈앞에 미술관이 떡하니 나타나는 게 아닌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더위도 피할 겸 발도 좀 쉬어갈 겸 들어갔는데 그 미술관에서 바로 저 전시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건 운명이다! 냉큼 루브르 전시회의 티켓을 끊고 들어갔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루브르만 보고 갈 수는 없다 싶어 이나가키 도시지로라는 분의 전시회도 함께 끊어 들어갔다.


교토 교세이 미술관 그리고 이나가키 도시지로의 작품. 전시회 중 딱 세 작품은 사진 촬영이 가능해서 찍을 수 있었다.


 루브르 전시회도 좋았지만-티켓값이 거의 두 배 차이였는데- 내 눈을 끌었던 건 일본 예술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던 전시회였다. 이나가키 도시지로의 작품뿐만 아니라 근대 일본 미술을 이끌었다고 하는 다케우치 세이호와 우에무라 쇼엔의 작품들도 함께 볼 수 있었다. 그냥 한 마디로 '좋았다.' 작품에 대해 구체적으로 무엇이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유구무언. 그 작품의 주제가 무엇인지 어떤 기법으로 표현한 것인지 그것이 요즘 현대 미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하나도 모르지만 널찍한 공간 안에서 고요하게 미술 작품들을 만나는 게 좋았다. 누군가는 지적 허영심의 발로라고 꾸짖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내면 안에 기분 좋은 포만감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물론, 그 기분 좋은 포만감에 나는 '블루보틀'로 가는 걸 깜박하고 말았지만.


 만약 허락된다면, 거기가 어디든 여러분들이 간 도시의 미술관을 한 번 들러보기를 추천한다. 크든 작든 거기에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사유와 투쟁 그리고 삶이 담긴 작품들이 있을 것이다. 그 작품들이 내뿜는 그 이야기들을 듣고 오면 좋겠다. 언어를 몰라도 몸짓과 손짓 그리고 표정으로 말이 통할 수 있는 것처럼 미술작품의 주제와 표현 기법 등을 몰라도 작품들과 말이 '통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늘 겨울에만 오던 교토를 여름에 와야겠다고 마음먹은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철학의 길과 은각사 때문이었다. (교토에 와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마츠리!)

 여름이고 또 언제 비가 올지 몰라 샌들을 신고 왔는데 며칠 신었더니 기어이 발에 물집이 잡혔다. 왼쪽 무릎에는 연골이 없어 오래 걷지 못한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왼쪽 무릎 때문이 아니라 물집 때문에 걷는 것이 곤욕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철학의 길로 향하는 이유는, 이 길은 '걸을 때 비로소 진가가 나타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름 내음 가득한 철학의 길은 처음인지라 물집으로 발이 아프지만 걷기를 자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길의 본래 이름은 '사색의 작은 길'이었다고 한다. 교토의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이 길을 거닐며 사색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는데 시간이 흘러 지금의 '철학의 길'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 시절 철학을 복수 전공하면서 아주 잠시 들었던 이름이었는데 그 이름을 철학의 길에서 발견하게 되었을 때 마치 오래 알고 지내온 사람을 만나게 된 듯 기뻤다. 물론, 내가 아는 거라고는 불교의 사상을 통해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를 연구했던 사상가이며 한국인으로서는 불쾌하게도 대동아전쟁의 타당성을 이론적으로 지지했던 철학자였다는 게 전부지만 말이다. 그가 이 아름다운 길을 걸으며 대동아전쟁이 이론적으로 문제가 없음을 고민했을까를 상상하면 일면 이 길에 대한 애정이 식기도 하지만 사람의 과오는 그 사람에게 묻는 것으로 하자. '길' 자체는 죄가 없으니.



 철학의 길을 호기롭게 선택한 이유는, 은각사 가는 길에 '요지야'라는 카페가 있기 때문이었다. 중정이 아름다워 녹차를 마시고 정원을 감상하는 맛이 일품이었다. 코로나의 타격을 피해 가지 못했는지 폐업을 하고 말았다. 좋은 곳을 한 군데 잃었구나, 아쉬움도 잠시. 물집 잡힌 발이 아파서 잠시라도 쉬어갈 곳이 필요했다. 꽤 많은 카페들이 문을 닫았는지 가는 길 내내 문을 연 카페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을 연 작은 카페를 발견했다. 엔틱크하고 오랜 세월을 품은 탁자며 의자 그리고 찬장이 곱게 낡아가고 있었고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클래식 음악은 나를 오래전 '아름다웠던 어느 시절'로 바래다주는 듯했다. 적절하게 절도를 갖추면서도 편안하게 나를 맞이해 주는 두 분을 보고 있자니 안심이 되었다. 카페 안에는 이미 동네 분들로 보이는 어르신 두 분이 계셨다. 모두가 아는 사이인지 함께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고 고와 보였다. 그 풍경 안에서 나도 잠시 쉴 수 있었다.


사진 한 장을 찍었는데 괜찮냐는 말에 괜찮다고 흔쾌히 이야기해 주시는 두 분이 참 감사했다.


 바깥을 물끄러미 내다보니 한쪽은 철학의 길이 다른 한쪽엔 동네가 보였다. 작은 집들이 개성 있으면서도 조화롭게 앉아있다. 나중에 이런 동네에서 늙어간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칭에는 동네 친구가 하는 카페에 가서 신문을 읽으며 커피 한 잔을 하고 친한 동네 사람이 들어오면 읽던 신문을 내려놓고 시시껄렁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웃을 수 있다면 나름 잘 살았다고 느끼지 않을까.


 두 분이 함께 있는 사진을 찍으면서 이 카페와 함께 우아하게 늙어가는 두 분이 참 멋있어 보였다. 아니다, 저 두 분과 함께 카페가 우아하게 낡아간다고 하는 게 맞겠다. 늙고 낡는다는 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잠시 쉬어가는 이 카페에서 깨닫게 된다.




 만약 내가 일본에서 한 달을 살 수 있다면 교토에서 그리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고른다면 철학의 길이 있는 동네에서 살아보고 싶다. 철학의 길 끝에는 은각사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나는 다른 어떤 곳보다 이 은각사가 좋다. 우리나라 사찰은 들어오는 순간부터 속세와의 이별이 시작된다. 숲길을 지나 드디어 사찰 앞에 다다르면 연못이나 시내가 있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를 건너는 순간 이제 속세와는 완전하게 단절되고 부처의 세계가 펼쳐지는 듯하다. 이 다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은각사에서는 동백나무와 대나무가 빽빽하게 만들어놓은 담이 아닐까 싶다. 이 길을 건너면서 우리는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게 길을 건너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바로 관음전이다. 그리고 그 관음전 앞에는 후지산을 형상화했다고 하는 모래를 쌓아 만든 가레산스이와 풀과 이끼 대신 모래로 만든 가레산스이가 등장한다. 이 모래로 만든 정원을 보고 있으면 한없이 마음이 고요해지고 적막해진다.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속에서도 이 모래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점점 소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은각사의 이 모래정원은 불교 선종의 사상을 재해석했다고도 하고 어떤 분은 그저 담백하고 간결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무엇이 되었든 나는 이 모래 정원을 보기 위해 철학의 길을 거닐었고 앞으로도 교토에 들르면 이곳은 반드시 오게 될 듯하다.



나는 사실, 미워하고 있는 중이다.


 여행 오기 바로 전, 내가 사랑하는 동료들에게 심하게 상처받아 '아픈' 상황이었다. 동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느낀 건 '절망과 서운함 그리고 아픔'이었고 이 감정들은 금방 미움으로 번졌다. 시간을 두고 떠나 있으면 해결되겠지, 이 여행의 끝에는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은각사 모래 정원의 정갈함과 단순함 속에서 나는 결국 동료들에게 상처 입은 나와 그 동료들을 미워하고 있는 나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사실, 아직도 아픈 중이었고 동료들을 미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걸 다시 한번 깨닫고 나니 더 아팠다. 남은 일정은 조용히 접어두고 다시 호텔로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늘을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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