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2)
엄마는 늘 엄마 편이 필요했다. 그건 절대적이어서 그 어떤 논리와 상황의 변수도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 대상이 누구든, 엄마는 엄마 편이 필요했다. 그리고 으레 내가 엄마의 편에 서곤 했다. 동생도 그렇게 엄마의 편에 서고는 했으나 엄마의 말에 의하면 나만큼은 아니었다. 그랬던 내가, 엄마의 말에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은 것은 물론 당연히 당신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이모들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거기에 나는 연락도 안 하고 지내는 이모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에 엄마는 세상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너네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그 후 엄마는 내 연락을 받지 않기 시작하셨다. 본가에 오는 날까지도 엄마는 내 연락을 전혀 받질 않으셨다. 당신 편이 아닌 내가 엄마는, 불편하실 수밖에 없으리라. 내가 엄마를 비난한다고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모와 전화를 해서 엄마 흉을 본다고도 망상이 뻗칠 수도 있겠다. 동생에게 연락해 보니 역시나, 엄마는 내 연락을 일부러 받지 않고 있으셨다. 동생은 나에게 자기가 엄마 마음을 잘 풀어놓았으니 이상한 말은 하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가라는 충고를 들었다. 어떤 이야기를 안 하면 좋겠냐고 다시 물었더니 ‘아빠 이야기, 외가와 친가 이야기 모두’ 하지 말라는 답이 왔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우리는 암묵적으로 ‘그 이야기’들은 하지 않고 있다. 이건 내 쪽에서도 감사한 일이었다. 오히려 엄마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까 봐 엄마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은 피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혼하고 나서 엄마는 엄마의 편이 없었다. 가장 내 편이 되어야 할 아버지는 결국, 말 그대로 ’남 편‘이었고 자식을 먹여 살리고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그 누구도 엄마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문제는 산더미였고 엄마는 혼자였다. 당시 나와 동생도 돌봐야 할 존재였지 엄마에게 힘이 되는 존재는 아니었으리라. 몸이 아플 때에도, 내일 내야 할 공과금이 밀렸을 때에도, 마음이 허하고 외로움이 사무칠 때에도 엄마는 혼자였다. 엄마는 살기 위해 친구들은 물론, 친인척도 끊어버렸다. 혼자를 선택했으나 엄마도 사람인지라 최소한 나와 동생은 엄마의 편이길 바랐던 것이다. 엄마에게 ‘내 편‘이라는 것은 자신의 모든 상황을 이해받는 것이리라. 도덕이고 예의고 뭐고 간에 그저 엄마의 결정에 엄마가 맞다는 그 말 한마디를 듣고 싶은 것이리라. 엄마가 욕하면 같이 욕해줘야 하고 엄마가 틀리다고 하면 틀렸다고 해야 하는 바로 그 편. 그런 엄마를 생각할수록, 내 마음은 더욱 수렁으로 빠져드고 만다.
왜냐하면 엄마는, 아픈 사람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현재, 아픈, 사람이다.
엄마는, 현재, 아픈, 사람이다.
나도 아파봐서 그런가, 엄마가 지금 아프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당시 나는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내 편을 들어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내가 업무로 받고 있는 부당함을 쏟아내고 다녔다. 내 상황에서는 일련의 그 행동들이 상당히 논리적이고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당시의 상황을 ‘내 상황’을 기준으로 해서 상대방을 설득할 자신도 있다. 내 동료들은 물론, 당시 내 상담 선생님도 머리로는 충분히 납득이 된다고 하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맞는 말’ 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욕지기를 하며 토해낸 이야기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다가갔을까.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동료들은 나를 만나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만나서 내 이야기를 듣더라도 고요하게 내 말을 잘 흘려보내고만 있었다. 나중에 여쭤보니 선배들은 ‘ㅁㅁ이가 지금 환자구나.’ 하는 마음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계셨다고 한다. 나와 함께하는 동료들이 좋은 사람들이었으니 망정이지 결국 내가 쏟아낸 이야기들도 ‘토악질’에 불과해서 그걸 오롯이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곤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 나는 내가 했던 불합리한 일들이 어느 정도는 인정받을 수 있으나 100% 올바른 말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내 입장에서 맞는 말이 상대방 혹은 다른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도 맞는 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엄마를 보며 나는 당시의 나를 떠올리고 있다. 엄마의 마음은 찢어질 대로 찢어져 어느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어 보인다. 그런 엄마를 피해 고작 몇 줄 글로 내 마음을 위안 삼는 내가 비참하기 이를 데가 없다. 엄마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엄마의 몫이 아니라 엄마를 향한 내 마음의 몫이다. 마음이 아픈 엄마에게 고차원적인 무언가를 요청하는 것은 못할 짓이니 말이다. 부디, 내 마음이 더 커져서 엄마의 모든 아픔을 다 껴안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