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모강, 스타벅스 그리고 무지개
누군가는 강을 경계라 여긴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경계라는 말에 경계한다. 강이 가로지르는 이유는 경계를 분명히 하고자 함이 아니라 아우르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강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예전에는 물을 먹기 위해, 몸을 씻기 위해 때로는 빨래를 위해 모였을... 삶을 이어가기 위한 젖줄, 그것이 강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이는 유효하다. 목이 마른 내 영혼이 강줄기에 입을 맞추고 온갖 우울과 성남, 아픔을 씻기 위해 물을 끼얹고 내 슬픔이 잔뜩 묻은 옷을 거기서 빨고 있다. 그래서 나는 강을 사랑한다. 물줄기가 풍만한 강을 보며 흐뭇해하고 반대로 여린 강줄기를 보면 마음 한켠이 아려 강줄기의 등어리를 천천히 쓸어내려주고 싶어진다.
내가 유독 교토에 마음이 가는 이유 중 하나는 역시, 가모강 때문이다. 강의 물줄기가 풍만하고 여유로워 거칠지 않다. 유흥을 아주 좋아하지 않는 터라 가모강과 운하 사이로 펼쳐진 유흥의 거리가 못내 아쉽지만 그럼에도 반쯤 눈을 감아줄 수 있는 건 역시 넉넉한 강줄기가 옆에 버티고 있어서가 아닐까.
점심을 넘기고 당연스레 나는 가모강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꽤 오래 걸었던 탓에 곧바로 가모강을 거닐지 않고 강을 마주할 수 있는 스타벅스로 들어간다. 여행을 오면 웬만하면 스타벅스를 비롯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들르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곳만큼은 예외. 오늘은 운이 좋다. 가모 강을 마주할 수 있는 자리가 나를 맞이한다. 테라스 쪽에도 자리가 있었으나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곳에 굳이 나 혼자 앉고 싶지 않았다. 가모강의 물줄기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생각을 멈추고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무지개가 어리기 시작하더니 하늘과 땅 사이에 분명하게 다리를 놓았다.
“어, 무지개다.”
카페 안에서 심지어, 테라스에 있는 사람들도 미처 인식하지 못했었나 보다. 가만히 응시하다 선명한 무지개를 놓치고 싶지 않아 기어이 카메라라 꺼내 들어 찍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무지개가 떴음을 깨달았는지 나와 함께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댄다.
“ありがとう!“
옆이 있던 일본인이 대뜸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아마도 내 덕에 무지개가 뜬 것을 알았다는 뜻일 게다. 십여 분이 흘렀을까. 무지개는 다리를 거둬들이고 눈앞에서 사라졌다. 애초에 거기 없었던 것처럼. 무지개를 응시했던 그 십여 분이 진짜인가 싶을 정도로.
어떤 때는 안 찍어. 아름다운 순간이 오면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냥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지. 바로 저기 그리고 여기
-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중에서
여행에 가면 찰나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그냥 그 자체를 응시한다. 내 눈과 머리 그리고 마음에 담아내기 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무지개-신께서 내게 주신 작은 선물인-만큼은 요란을 떨며 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가모강 주변을 천천히 걸어볼 차례이다. 적당하게 습한 바람이 분다. 음악을 들으며 거니는 사람들, 책을 읽는 사람들, 그저 햇볕을 쬐며 앉아 있는 사람들.... 다양하게 가모강을 누리고 있다. 저 앞에서는 친구들과의 수다가 즐거운지 청명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신기한 건 오리들이 고양이마냥 사람들 사이로 걸어 다닌다는 점일 게다. 그게 꽤 인상적이어서 오리들의 뒤꽁무니를 한참이나 따라다녔다. 천천히 따라붙었다고는 하지만 오리들도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건 느꼈을게다. 오리의 갈지자 걸음에 성급함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위해를 가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순수하게 골려줄 심산으로 나도 갈지자로 따라다니며 강약을 조절하기 시작한다. 아마 그때 누군가가 내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두었다면 누군가를 놀리고 싶어하는 개구쟁이의 무언가가 잔뜩 담겨 있었을 듯하다. 물론,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아저씨가 오리 한 번 놀려보겠다고 그렇게 장난을 거는 게 추태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만 이때만큼은 그런 처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집요하리만큼 오리들의 뒤꽁무니를 밟아가며 놀려주고 있던 그때. 오리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오리들이 갑자기 방향을 내 쪽으로 획 돌리더니 나를 향해 정면으로 빠르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 어? 이게 아닌데!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1, 2미터쯤 뒤로 갔을까. 오리들이 내 옆으로 위풍당당하게 지나갔다. ‘더 이상 너와 놀아주지 않을 거야.’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느껴졌다. 다시금 예의 그 느린 걸음으로 내 옆을 지나치는데 그 모습에 한참을 소리 낮춰 웃어댔다.
오리와의 작은 추격전이 끝나고 오리들도 나도 편안하게 거닐기 시작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편안하게 ‘자기만의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멈춰서 강을 응시하는 동안 오리들은 저만치 걸어간다. 오리들이 수풀에 무언가를 부리를 뒤지는 동안 나는 또 천천히 강을 끼고 걷는다. 각자의 걸음으로 거닐 수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