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훈남대디 Dec 24. 2023

배려하는 아이

아이의 마음 먼저 이해하고 존중하기

“양보는 남을 도와주고 배려하는 거야. 네가 양보하면 다른 사람이 좀 더 편해질 수 있어”

“네 장난감을 갖고 놀게 해 줘야 친구들이 더 좋아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과도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

“네가 누나니까 동생한테 양보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친구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야”          



아이를 키우면서 첫째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가길 바랐으면 하는 마음에, 아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이기적인' 아이 보단 ‘이타적인' 사람이 낫겠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다 보니 아이에게 양보와 배려를 당연시 여긴다. 내 아이는 그것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며, 그런 과정을 통해 연단되고 성장하는 거라며 내 '잔소리'를 합리화한다. 어느새 '선'의 기준이 아이 자신이 아닌 타인이 돼버렸다. '타인을 위한 선'에 가치를 두고 우리 아이가 그런 미덕(?)을 갖춘 아름다운 사람이 되길 바랐다. 아이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채.     


어느 저녁 아이를 씻기고 로션을 발라주던 중 아이 얼굴에 어디에 긁힌 것 같은 미세한 흠집이 3~4군데 나있었다. 심해 보이진 않지만, 어쨌든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무슨 일 있었어? 어디서 그런 거야?" 다급하게 물어보는 아빠의 말에, 친구랑 장난을 치다 좀 심하게 놀았다며 빨리 동화책이나 읽어 달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이번엔 태권도에서 동생이랑 놀다 넘어졌단다. 휴식시간에 같이 점프하며 뒤엉키고 놀다 같이 넘어졌는데 옷깃에 쓸린 것 같다며 말을 흐린다.  그러면서 나에게 "아휴 됐어..." 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유롭게 넘어간다.    

 

"아휴 됐어..."

"아휴 됐어..."     


그 말과 표정이 너무 충격이었다. 이제 막 일곱 살인 아이가 엄마 아빠한테 무슨 일이 있었다며 일러 받쳐도 시원찮을 판에, 자신은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 않는다는 표정과 제스처가 나에게는 너무 낯설었다. 늘 바빠 보이는 엄마와 아빠가 혹여라도 걱정하고 화를 낼 수 있을까 봐. 그 친구가 누구인지, 어디서 그랬는지, 아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그 친구를 잡아내고 낱낱이 취조할 아빠 모습이 상상되었는지 아이는 더 이상 판을 벌이려 하지 않는 모양새다. 그럼 친구도 불편해지게 될 것이고, 결국 그 난처함은 자신의 몫일테니 말이다. 하루 중 유일하게 엄마 아빠와 부대끼며 놀 수 있는 저녁. 이 소중한 시간을 그깟 자신의 ‘흠집’따위로 날리고 싶지 않았을 테다. 그보다는 아빠가 읽어주는 동화책이 더 중요했겠지.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어디에 긁힌 건지, 혹시 누구한테 맞은 건지, 아니면 누군가가 심하게 장난을 쳤는지'

보다 더 힘들었던 건 자신이 마주한 갈등과 불편한 상황을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하다고 할 수 있는 엄마, 혹은 아빠에게 말하지 않고 스스로 털어버리려 했다는 것이다. 말이 서툰 남동생과도 다투게 되면, 나는 동생보다는 마음이 상대적으로 넓어 보이는 누나에게만 날을 세웠다. 누나니까, 말도 잘하니까, 더 많이 가졌으니까, 상대적으로 부족한 동생을 위해 무조건적인 이해와 수용을 바랐다. 아이의 감정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기보다는 현재 마주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불편한 상황이 이어지는 게 싫어서 ‘누나’라는 타이틀을 이용해 무조건적인 ‘배려’를 강요했던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와 다툴 때도 늘 우리 아이만을 나무랐다. 아빠의 이런 독재에 아이는 억울할 것도, 서러울 것도 없다. “싸웠으니까”, 친구와 “다툰 건 맞으니까” 아이를 갈등 상황에서, 불편한 상황에서 회피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나’였다. 결국, 내 아이가 갈등을 일으키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두려웠던 거니깐.  

  

깊은 밤 아이가 자고 있다. 곤히 잠든 아이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도 평온하다. 이제 유치원생 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손과 발은 눈물 나도록 사랑스럽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 나중에 혹시 친구 관계로 어려움을 겪진 않을까, 왕따를 당하진 않을까. 이런 나의 극성스러운 걱정들이 모여 내 아이의 삶을 ‘자신’ 보다는 ‘타인’으로 채워 나가게 했던 게 아닐까.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느끼게 된 인생의 ‘국룰’을 초등학생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정답’이라는 이름으로 부담을 준 것 같아 미안하다. 이 무지막지한 ‘답정 너’ 방식이 아이에겐 얼마나 가혹했을까.             


사랑하는 내 자녀에게 앞으로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네 나이엔 그럴 수 있어.”

“충분히 이해해.”

“우리 하나하나씩 같이 배워나가자.”

“오늘 너의 감정은 어땠어?"

"많이 속상했겠구나"

“말해줘서 고마워”

“사랑해”

매거진의 이전글 화를 다스리는 가장 쉬운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