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라니 마르티네즈 <PORTALS> 리뷰
R. I . P CRYBABY. 깊고 어두운 숲속 가운데 자리한 비석 위 선명하게 새겨진 글씨가 보인다. 발매 전 멜라니 마르티네즈의 SNS 채널들을 통해 공개된 이 숏폼 비디오는 4년 여 간의 공백 을 끝낸 멜라니 마르티네즈의 신호탄이다. 크라이 베이비는 멜라니 마르티네즈가 2015년에 발매한 데뷔 정규 앨범 <Cry Baby>에서부터 시작된 멜라니 마르티네즈의 음악적 페르소나 다. 아기자기하고 로맨틱한 감성의 로리타 양복 차림, 러블리한 헤어 스타일의 소녀는 달콤 하고 몽환적인 멜로디에 조금은 섬뜩한 가사를 얹어 잔혹 동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흔히 3부작 연출이라고 하는 방식을 통해 1부 <Cry Baby>는 크라이 베이비 개인의 서사에 집중 하고, 2부 <K-12>에서는 크라이 베이비가 학교를 다니는 모습을 노출한다. 멜라니 마르티네 즈가 직접 연출한 단편 영화도 이의 한 구성이다.
그리고 크라이 베이비의 마지막, <PORTALS>가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PORTALS>의 단초는 생과 죽음,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는 멜라니 마르티네즈가 직접 언급한 바와 같이 육체는 죽었으나 영혼은 불멸한다는 믿음에 서 기인한다. 앨범의 트랙들은 기존 방식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서사를 공유하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선공개된 <DEATH>는 멜라니 마르티네즈가 직접 연출한 뮤직 비디오와 함께 공개됐다. 아득 히 들려 오는 독백과 태동하는 심장 박동 소리로 포문을 연다. 탄생을 노래하는 목소리는 언 뜻 찬송처럼 성스럽게 들리기도 한다. “I’m back from the death’라는 가사처럼 죽음 후 다시 태어난 크라이 베이비는 인간이 아닌 형태를 띄고 있다. 이는 멜라니 마르티네즈가 생각하 는 영혼 그 자체의 순수함을 표방한다. 분홍색 피부와 네 개의 눈, 그로테스크하지만 묘하게 사랑스러운 비주얼의 요정은 크라이 베이비 3부작을 마무리 지음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선포한다. 얼터너티브 록 장르를 베이스로 웅장하게 깔리는 신디사이저와 보컬 튠들은 차곡 차곡 쌓여 그런지(grungy)한 포효를 만들어 낸다. 더해지는 드럼과 일렉 사운드는 멜라니 마 르티네즈 세계관의 핑크빛 디스토피아를 뒷받침하는 정서가 된다. 어딘가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 가는 사운드를 끝으로 홀린듯이 트랙을 넘기게 된다.
이어지는 <VOID>는 영혼 내면 깊은 곳의 공허함에 집중한다. 이는 요즈음 시대의 자기 성찰 과 혐오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허나, 도망치려는 자가 스스로 만든 감옥임을 깨닫고 절규 한다. <TUNNEL VISION>은 <PORTALS> 앨범의 정체성을 방증한다. 순수한 영혼이 되어 내면을 노래하는 모습은 찬송을 연상케 하고, <FAERIE SOIREE>와 <LIGHT SHOWER>는 정화 되는 영혼의 순수함을, 사랑을 코어로 한 인류애로 성장한다. 초반 멜라니 마르티네즈가 추 구하던 어쿠스틱한 음악의 컬러와도 연결되어 있다. <SPIDER WEB>와 <THE CONTORTIONIST>는 사회 비판적인 시선을 담고 있어 사회 이슈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는 멜라니 마르티네즈의 가치관이 담겨 있는 음악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MOON CYCLE>, <NYMPHOLOGY>, <EVIL> 등의 음악을 통해 전작인 크라이 베이비의 여성적 서사를 이어 나감과 동시에 내면의 고뇌를 통해 세상이 정해 둔 구속에서 탈피하려는 몸부림이 느껴진 다. 마지막 트랙을 장식하고 있는 <WOMB>은 탄생 서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이 는 결국 끝이자 처음을 의미한다.
몽환적인 보이스와 추상적 가사, 그에 걸맞는 비주얼라이징은 신선하다 못해 알싸한 충격을 선사한다. 하나의 우주처럼 전체를 아우르며 자전하는 트랙은 크라이 베이비의 페르소나를 빌려 말하고 있지만 사실 한 영혼의 메타에 관한 이야기이며, 곧 감정의 코어를 의미한다는 것을 앨범 말미에 깨닫게 된다. 이 세계 너머 속박 없는 세상만이 음악적 유토피아는 아니겠지만, 그로 인해 한 층 더 순수해진 세계를 맛볼 수 있음은 틀림없다. 하나의 삶이 피어나고 지는 과정 이후 다시 등장할 그녀의 무궁무진함의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