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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피아노 학원비 유용사건

by 시옷맨션 인사이트

초등학교 3학년 즈음이었다. 그 시절 초등학생들은 학교를 마치면 미술학원이라든지, 피아노 학원이라든지, 태권도장이라든지를 다니는 것이 '국룰'이었다. 사실 우리집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는데, 친구들이 다 학원을 가니 나도 보내달라고 떼를 썼었다. 그렇게 내가 우기고 우겨서 다녔던 곳은 피아노 학원이었다. '예그린'이라는 간판이 커다랗게 달려 있었는데 당시에 동네에서 제일 원생이 많은 학원이었다.

피아노 학원을 등록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피아노와는 거리가 멀었다. 친구들과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흥미도 없는 피아노 앞에 2시간가량을 앉아있는 것은 아주 고역이었다. 피아노 하나만 겨우 들어가는 방에서 갇히다시피 해서 건반을 눌러대다가 꾀를 부려볼까 싶어 뒤를 돌아보면 문에 억지로 매달려있는 듯한 조그마한 창문으로 선생님이 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 억지로 뚱땅 뚱땅거렸다.

어느 날부턴가 학원을 무단결석하기 시작했다. 학원을 가지 않은 날에는 집에 가서도 좌불안석이었다. '혹시나 학원에서 전화가 오면 어떡하지' 걱정하면서도 계속 결석했다. 며칠 동안 학원에서 전화가 안 오니 '아, 학원에서도 나를 놓아줬나 보다' 생각하며 안심했다. 그러다가 학원비를 내는 날이 찾아왔다. 당시에는 학원비를 계좌로 보낸다거나 카드로 결제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학원에서 정성스럽게 만든 학원비 봉투를 내가 가져다주면 엄마가 학원비를 넣어서 다시 학원으로 돌려줬다. 학원비는 45,000원이었고, 운반책은 물론 나였다.

어린 나는 단순하게도 '학원에서 나를 포기했으니 이 회비는 내가 쓰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봉투를 들고선 바로 근처 문방구로 달려가서 당시에 가장 인기 있던 로보트인 '지구용사 선가드'를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커다란 로보트를 보관할 곳이 없던 나는 집 옥상 장독대 옆에다 숨겼다. 엄마가 가장 자주 가는 곳인데. 이래나 저래나 걸릴 운명이었다.

학원을 결석하고서 생긴 '불안감'은, 학원비를 '유용'하고 나서는 극도의 '걱정'으로 바뀌었다. 걱정을 다 잡고자 고사성어 책을 집어 들어 읽었는데, 마침 '기우'에 관련한 내용이었다. 그 책을 읽고선 일어나지 않을 앞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기로 마음을 다 잡았다. '학원비 유용'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 믿었나 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였지만, 어린 나는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 학원에서 전화가 온 것은 참 얄궂은 우연이었다. 그때 나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키워주신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피아노학원비 유용사건'의 교훈으로(물론 내가 잘못했지만) 무조건적으로 누군가가, 혹은 책이 주는 가르침으로 나를 무조건 합리화하는 것은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자기합리화를 하지 말자'라는 깨달음을 얻은 계기가 10세 소년이 저지른 일탈이라는 것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어디서든 배움이 있을 수 있으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앞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침을 얻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날씨가 맑아 무심코 쳐다본 하늘에서 불현듯 '기우'라는 성어가 떠올라, 갑작스레 어린 나를 다시 한번 불러본다. 참고로 지금도 나는 '기우'란 말은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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