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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밥을 먹었으면 똥을 싸야지

by 시옷맨션 인사이트

"시옷! 책 좀 빌려줘."


친구 중에 나처럼 책읽는 것을 좋아하는 녀석이 있다. 물론 독서를 좋아한다고 본인이 누차 이야기하지만, 아직까지도 나는 단 한번도 친구가 책 읽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본 적이 있다면 중학생 때. 한창 유행하던 책방(비디오방)에서 판타지나 무협소설을 빌려가는 것 정도다. 여튼 오랜만에 연락 온 녀석의 첫 마디는 책을 빌려달란 말이었다.


"요즘 좀 무료하냐? 갑자기 책을 다 찾고."

"회사-집, 회사-집 하다보니 활자를 읽고 싶더라고."

"그래? 그럼 우리집 와서 책 좀 쓸어가라."

"ㅇㅋ"


웬 책이냐는 나의 물음에 친구는 그냥 생활이 단조로워서 활자가 읽고싶다고 말했다. 이 녀석은 우리 친구들 무리에서 골칫덩이다. 중학교 시절 만나 아직까지도 철 없이 노는 친구들 무리 중 이 녀석만 짝이 없고, 세상에 대한 큰 도전의식 없이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얼른 짝을 만났으면 하는 친구들의 걱정어린 생각이다). 물론 본인이 행복하니까 아무 문제없다.


나는 유독 이 녀석이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조금 더 재밌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눈'엔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만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녀석이 책을 빌려달라니. 내 책장을 다 털어서라도 줄 수 있다.


녀석은 차일피일 책 가지러 온다는 것을 미루던 중, 서울에서 다른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온다는 연락이 왔다. 마침 잘됐다 싶어 우리집으로 친구들을 모두 불렀다. 그 녀석도 물론 포함. 저녁 늦게 모인 우리는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고, 다들 거나하게 취했다. 오랜만에 모였지만 늘 똑같다. 늘 하던 추억얘기를 하고 또 했다. 그러다가 그 녀석이 책장 앞을 기웃거리다가 책 세권을 뽑아냈다.


사피엔스 / 하얼빈 / ???


취향은 참 일관적이다. 녀석은 항상 인문학과 역사를 좋아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역시나 딱 그런 책들을 골랐다. 두 권은 기억나는데 나머지 한 권은 무슨 책인진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다음날에 나머진 뭐냐 물어볼까 하다가 숙취에 그냥 휴대폰을 던져버렸다.


어쨌든 그날로 다시 돌아가서, 책을 꺼내든 녀석은 독서에 대한 본인의 지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독서라는 것은 읽기만 하면 된다.'는 것인데, 뭐 여기까지야 괜찮았다. '읽는 행위'만으로도 인류는 커다란 도전을 하고 있다고 했다. 공감했다. 애초에 인류의 뇌는 글을 읽는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고 한 칼럼을 어디서 본 적이 있다. 친구본인의 생각도 그렇다는데 내가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그 다음부터 이야기 하는 것들이 내 속 안의 뭔가를 건드렸다.


녀석은 얼마 전에 '총, 균, 쇠'를 완독했다고 했다.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아서 '오~' 하며 무슨 내용인지와 어땠는지를 물었다. 친구는 잠시 머뭇하더니 로보트처럼 어떤 문장 두 줄 정도를 말했는데, '총,균,쇠'를 검색하던 다른 친구가 그건 네이버에 있는 내용이라며 깔깔거렸다. 그 녀석도 '나는 활자 읽는 것을 좋아하지, 생각은 네이버에 다른 사람들이 해준다'며 같이 껄껄거렸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나의 지론은 '책을 읽었으면 본인의 생각이 남아야된다'는 것인데, 그것이 비록 휘발성이라도 어딘가에 기록을 남겨두거나 끄적거려놓는다면 휘발되지 않고 영원히 남는다. 그리고 언젠가 그 기록들을 살펴보면 당시의 나를 다시 발견할 수 있기에 아주 유용하다. 내가 빌려준 세 권의 책 효용이 사라지는 것만 같아 영 불편했다.


지금 이렇게 글로 쓰니 제법 사람같이 나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지만, 당시 만취한 나는 그 녀석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야, 밥을 먹었으면 똥을 싸야될 거 아니냐. 똥 좀 싸라, 똥!"


다음날 아침, 우리집에서 해장까지 하고 가는 녀석들을 배웅할 힘조차 없던 나는 침대에 쓰러져있었는데, 그 녀석이 내게 말하고 서둘러 나갔다.


"이번엔 똥 함 싸볼게. 새X야."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녀석은 똥 쌀 녀석이 아니다. 아마 다음 모임 때 즈음에 책을 더 들고갔으면 들고갔지 '똥'을 보여주진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지금 싸는 똥은 냄새가 참 고약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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