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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더 이상 수정하시면 안돼요!

by 시옷맨션 인사이트

어느 회사나 그렇듯 A부서에서 B부서로, B부서에서 C부서로 자료를 보내고 취합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출한 자료의 내용이 변경되어 수정본을 새로 보내기도 한다. 아주 당연하고도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초등학생도 이해할만한.


얼마 전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A부서에서는 다른 부서들로부터 어떤 자료를 취합하는 업무를 시작했다. 그 업무는 수정소요가 많기 때문에 이미 제출했던 자료들이 지속적으로 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수정본을 보내는 부서가 태반이었다. 나는 현재 근무하고 있는 부서에 오기 전에 그 부서에서 그 업무를 담당했었기에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되고 마무리까지 해야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 A부서의 담당자는 나에게 자주 연락해 업무적으로 물어보곤 했다. 그때마다 아주 친절하고도 세세하게 알려주었는데, A부서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낸 형이 업무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너무 그렇게 다 알려주지 말고 그냥 모른척 하라고 했다.


A부서의 현재 담당자와 그 형이 같은 팀에 있었는데 사이가 별로였나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어쨌든 나는 전에 해봤던 담당자로서 그 업무의 수정소요를 최대한 줄여서 제출하고자 마음 먹었다. 그래서 내가 제출했던 자료의 수정본은 단 한개였다. 최초에 제출했던 자료 외에 한 번의 수정소요만 만들어서 제출한 것이다. 다른 부서에서는 아니나다를까 수정본이 쏟아지고 있었다. 수정1, 수정2, 수정3, 최종, 진짜 최종, 진짜 진짜 최종. 흔히 오피스물 드라마에서 다룰 법한 파일 제목들이 생성되고 있던 것이다.


홀가분하게 그 업무를 마친 뒤 일주일정도 지났을 때였다. A부서에서 자료 취합본을 모든 부서에 공문으로 보냈다. 취합된 내용의 자료이니 업무에 참고하고 이에 따라 추가로 해야할 사항들을 적은 내용이었다. 당연히 자료를 열어서 내가 제출한 내용이 제대로 반영이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웬걸. 내가 제출한 우리 부서의 내용이 처음에 제출한 버전이 올라가있고, 수정하여 제출한 것은 단 한군데도 반영이 되어있지 않았다. 제법 중요한 업무였기에 식은 땀이 났고, 뒤이어 확인한 나의 부서장도 왜 이게 반영이 안되었냐고 묻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A부서의 담당자에게 연락했다. 담당자는 '아' 라는 짧은 한숨을 토해내고는 다시 연락을 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 사이에 나는 부서장에게 가서 A부서에서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다며 '없어 보이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하였다. 속마음으론 '그 사람이 잘못했어요!'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다 큰 성인 직장인이 초등학생마냥 그럴 순 없었다. 어쨌든 일은 진행되어야 하고 자료는 수정되어야하므로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내 자리의 전화가 울렸다.


"시옷씨, 더 이상 수정하시면 안돼요!"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전화를 받자마자 A부서의 담당자는 정확하게 저렇게 말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리쳤다. 내가 든 수화기 밖으로도 저 소리가 새어나왔고 그 정도면 A부서에는 쩌렁쩌렁 울렸을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저는 수정본 하나 보낸 이후로 다른 수정을 한 게 없는데요."

"됐고, 일단 그리 아시고 새로 공문 나갈거니까 그리 아시고 끊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내가 모르는 수정본이 있나? 아닌데 없는데?'를 수없이 되뇌이며 자료들만 응시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퇴근시간이 찾아와 일단 사무실을 나섰다. 집으로 운전을 하는내내 찝찝했다. 업무 시작과 끝을 다시 생각해봤다. 그리고 그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야만 했던 상황도 가정해서 생각해봤다.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았다. 내일 출근하게 되면 A부서의 친한 형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봐야지하며 눈 앞에 날파릴 쫓는 양 손사레를 쳤다.


다음날 친한 형에게 연락해보니 답은 나왔다. 그 담당자가 어제 전화 한 통(아마도 자료가 잘못된 것 같다는 나의 전화일 것이다)을 받더니 갑자기 안절부절 하더란다. 한숨을 푹푹 쉬며 나즈막하게 혼잣말도 욕도 했더란다. 그러다 담당자의 팀장이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냐 물었고, 잠시간의 정적 후에 현재 내가 있는 부서에서 수정소요를 냈다는 것이다. 이미 업무의 모든 것이 결재가 끝난 상황에서 본인의 실수로 다시 결재를 받아야 한다고 보고하는게 싫었을 것이다. 그 책임을 나에게 돌린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전가의 확인사살로 나에게 전화를 했고 대뜸 더 이상 수정하면 안된다고 소리치고 끊은 것이다.


속이 타들어갔지만 이내 부여잡았다. 현재 A부서에는 아직까지도 내가 근무했을 때에 같이 있던 동료분도 많기때문에 얼마든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 일에 대한 소명을 할 수도 있었다. 현재 그 담당자에게 왜 거짓말을 하냐며 면박을 할 수도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는 업무에 대해서는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스타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동료직원들에게 많은 원성을 사고 있다고 했다. 왜 본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완벽한 사과를 하지 않는지는 의문이었으나, 친한 형이 처음에 모른다고 하고 넘기라고 한 것이 단번에 이해가 됐다.


나도 일에 대해서는 못한다거나 실수했다는 소리는 듣기가 싫다. 아니 어느 누구도 그러길 원치 않는다. 때문에 꼼꼼하게 여러차례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게 직장인의 숙명아닌 숙명이다. 얼른 전화기를 들어 그가 이렇게 저지른 것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고 A부서에 퍼졌을 '나의 실수'를 정정하라고 하려다 다시 내려놓았다. 그 업무를 담당해봐서 그런지 바쁘고 긴박했던 그 부서의 공기를 생각해보았고, 여러 결재라인을 또 거쳐야하는 그 심정을 내 입장에서 고려해봤다. A부서의 팀장, 과장, 국장 등등의 라인마다 실수를 설명하고 다시 결재받기가 껄끄러웠을 것이다.


완벽주의자인 그에게 이런 실수는 그의 '글로리'가 깨지는 것이다. 물론 내가 그의 글로리를 박살내는 '문동은'이 될 수는 있었지만 분란을 만들지 않는 것이, 아니 그냥 그와 더이상 엮이지 않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았다(현재 그 담당자는 나보다 열 살정도 많다). 어차피 직원들 사이에서 그의 평판은 좋지 않은 편이기도 하니, 괜히 이전투구 형식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입으로 습습후후 내뱉으며 나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조용히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오늘도 지구를 지켰다. 시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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