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의 글
청진기로 듣는 소소한 이야기 #16
날이 궂은날엔
글을 쓰지 않고
글을 담습니다
마음속 어느 작은 방
조그마한 책상아래 제일 아래칸
손이 닿지 않을 만한 서랍에
차곡차곡 글을 쟁여 담습니다
그러다
어느 쨍하고 푸르른 날에
오래된 담아 놓은 글을
한 자락 두 자락 들춰봅니다
장아찌처럼 곰삭은
식혜처럼 달큰한
청국장처럼 구수한
순서 없이
쟁여 놓은 글들은
어느새
잘 익어 있습니다
남의 심장을 후비는
매서운 칼날도 무디어지고
사랑하는 사람의 살점을 패이는
날카로운 손톱도 다 닳아지고
누군가를 사정없이 깨무려던
송곳니도 꺾여버리고
펄펄 들끓는
미움의 자갈밭을 지나서
정제되고
순전한
단 한 줌의
눈물샘만
남았습니다
이제
어느 쨍하고 푸르른 날이 다시 오면
나는
하늘빛을 닮아 푸르게 빛나는
한 자락의
눈물자국을 따라
한 줌의
글을
퍼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