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라는 세계의 법칙
청진기로 듣는 소소한 이야기 #22
환자를 만나다 보면 각양각색 별의별 환자를 다 만나기 마련이지만, 그 와중에도 공통적인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면, 관절염이 심해져서 옴짝달싹도 못할 경우에는, 이것저것 다 힘들고 귀찮아져서 하던 일도 그만두게 되고 집안 일도 대~애충 대충 하기 마련인데, 이런저런 치료를 통해 아픈 곳이 호전되고 웬만큼 관절을 쓸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꼭 과도하게 무리하는 분들이 계시더라는 것이다.
몸은 아직 그 정도 상태가 아니고, 그 정도의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데, 마음이 앞서가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밀렸던 집안일, 그동안 못했던 운동, 그동안 가족들에게 신경 쓰지 못했던 것에 대한 마음 한 구석의 아쉬움, 미안함, 불편함, 경제적인 다급함이 있다는 것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몸을 좀 쓸만하게 되니 어느 정도까지 몸이 회복되었는지 시험해 보고자 하는 마음도 충분히 알겠다.
하지만, '몸'이라는 세계에는 그들만의 법칙이 있다.
그 법칙을 '마음'이 앞서서 끌고 간다고 해서 그렇게 끌고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혼동의 요소는 이것이다.
'회복'과 '단련'을 종종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회복'이란 잘 알다시피 정상적인 상태에 한참 못 미치는 병적인 상황이나 연약한 상황에서 정상 컨디션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을 말하고, '단련'이란 정상적인 상황에서 더 높고 더 나은 상황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그러니, 환자가 '회복' 과정을 보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뜬금없이 '단련' 과정으로 점핑을 하면 아무리 마음은 그러고 싶어도 몸이 따라가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관절을 좀 쓸만하니 그동안 별러왔던 김장을 담근다든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버린 텃밭에 나가 하루 종일 쪼그려 앉아 김을 맨다든지,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걷기 운동을 2시간씩 한다던지, 잔뜩 밀려있던 속옷이랑 양말을 모아다가 손빨래를 한다든지, 애초에 관절이 아파서 식당일을 그만두었는데 성급하게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는 경우 등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 모두 겨우겨우 회복했던 관절염을 도루묵으로 만들어 버리기 십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몸'이란 참으로 우직하고, 그러면서도 참으로 정직하다.
몸은 쓸데없이 과장하는 법도 없고, 간사하게 거짓말을 하거나, 안 되는 걸 대충 할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꼭 필요한 과정이라면 허투루 건너뛰는 법이 없다. 한 걸음씩, 한 단계씩, 정직하고,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 그들만의 법칙인 것이다.
그래서 (이건 그냥 나만의 편견이라고 해 두자) 나는 머리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보다 몸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그 직업적 특성들이 그 사람의 인격에도 많이 묻어 나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기술을 자신의 몸에 습득하고 그것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어디 금방 만들어지던가 말이다. 오랜 세월 반복되고 경험되어서 굳은살이 박혀야만 그 기술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던가. 오죽하면 '이 바닥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다 생기게 되었을까. 장인의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은 그 어떤 면허증이나 상장, 증표보다도 더 신뢰를 주지 않던가.
오늘 한 환자가 마음만 앞서가서 무리한 후에 그동안 했던 치료가 도루묵이 되어버린 경우가 있었기에 심란한 마음을 이렇게 털어서 적어본다.
이 와중에도 갑자기 제주도에서 맛있게 먹었던 '몸국'이 생각나는 건 내 몸의 정직한 반응인가? 별스러운 반응인가? 아니면 팔랑거리는 마음의 말할 수 없는 가벼움의 결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