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로 듣는 소소한 이야기 #26
때로는 누가 사진을 찍는지, 언제 찍는지도 모르게 사진이 찍힐 때가 있다.
오히려 그럴 때가 더 자연스럽게 사진이 나올 때가 많다.
그리고 나중에 그 사진을 꺼내어 보았을 때, 그 당시의 화기애애한 분위기, 햇볕의 따스함, 시원한 바람에 섞여 흐르는 낙엽의 냄새, 눈을 황홀하게 만들었던 반짝이던 단풍의 향연들이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장인어른은 여러 번 중풍으로 쓰러지셨다가 일어나셨고, 막힌 혈관의 수술을 비롯하여 여러 군데 스텐트(stent)를 심어 놓은 상태이시다. 쓰러지실 때마다 점점 더 걷는 것과 일어서는 것이 어렵게 되었고, 최근에는 거의 집안에서만 생활하시게 되었다.
잠깐 밖에 외출이라도 하려면 휠체어가 필수적이다. 신발을 신는 것도 현관을 나서는 것도, 차에 오르고 내리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처남이 아버지, 어머니 단풍구경 시켜드리겠다고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장인 장모를 모시고 4박 5일간의 전국 단풍투어를 시작한 것이다. 나와 아내는 마침 하루 휴가를 내어 동참하게 되었다.
이곳은 설악산
무장애길을 잘 닦아 놓은 비선대 가는 길이다.
처남이 끄는 휠체어에 줄곧 앉아계시던 장인어른은 허리가 더 아파온다고 하시며 잠깐 걸어보겠다고 하셨다. 누군가의 손을 지탱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하시며 처남 손목도 잡아봤다가, 내 손목도 쥐어봤다가, 둘 다 마음에 안 드는지 제일 가느다란 딸 손목을 잡고 걸어가신다.
처남이나 내 손목은 너무 두꺼워서 불편하다고 하시면서...
평소에는 잘 못 걸으시던 장인어른도 딸 손목을 의지해서 꽤 많이 걸어가셨다.
아내는 "아니 잡을 사람 손이 없어서 제일 힘 못쓰는 내 손을 잡고 가시냐?"라고 투덜댔지만, 사진에서 보다시피 얼굴은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처남은 앞으로 뛰어나가 그 순간을 사진으로 찍은 것인데, 누구도 카메라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만큼 자연스럽고 소중한 시간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가장 젊고 멀쩡한 처남은 앞으로 뛰어나가 뒤를 돌아보고 챙기며, 그다음 멀쩡한 사위는 맨 뒤에서 빈 휠체어를 끌고, 제일 힘 못쓰게 생긴 딸은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의 의지가 되고, 그 옆에 모처럼 자유가 주어진 어머니는 휘~휘 힘차게 걸어 나가시는 것.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지만, 가장 가족 같은 풍경이 아닐까 하는.
그래서 더 애틋하고,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그날의 단풍은 그래서 더 아름다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