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라는 그릇
청진기로 듣는 소소한 이야기 #32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할 때나, 어떤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고 할 때마다 새삼 깨달은 것은, 사람은 '감정이라는 그릇'에 사실을 담는다는 점이다.
나는 객관적인 말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나 자신도 어떤 [사실 1]을 내 감정이라는 그릇에 담아서 전달하기 마련이고 [사실 1+감정 1],
듣는 사람도 나에게 건네받은 [사실 1+감정 1]을 자신의 감정이라는 그릇에 담게 되니 {[사실 1+감정 1]+감정 2}, 실제로 그 사람이 받아들이는 사실이라는 것의 실체는
[사실 2]={[사실 1+감정 1]+감정 2}라는 매우 복잡한(?) 함수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니, 본래 내가 전달하려고 하는 사실관계보다도, 내가 담아서 전달하게 되는 감정이나, 받는 사람이 담아서 받아들이는 감정이 훨씬 더 큰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얼굴을 보면서 하는 대화도 어렵지만, 전화 통화를 할 때에 이런 점을 더 많이 느끼게 되는데, 이상하게 전화 통화를 주의 깊게 하지 않으면, 점점 더 대화는 오리무중으로 빠지고, 결국 의도하지 않은 감정의 깊은 골짜기만 남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내가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그런 말이 아니었는데... 왜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 왜 자꾸 왜곡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하는 경험들 말이다.
감정이라는 그릇이 사실의 향방을 좌우하는 지렛대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을 잊게 되면 이런 부작용들은 흔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중요한 말을 하기 전에 서로의 감정을 조율(tuning)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일견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내가 전하려고 하는 사실 자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감정의 조율(tuning) 작업을 다른 말로 '수다'라고 한다.
아무 내용이 없는 것 같지만 수다 속에서 사람은 많은 감정의 교류를 하게 된다. 끝없는 수다 후에 진실이 전달될 수 있는 바탕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감정의 교류 없이 직설적으로 전달되는 [사실]은,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언어폭력이 될 수도 있고, 억압이 될 수도 있으며, 긴장을 유발하는 독소가 될 수도 있다.
수다가 이렇게 중요하다.
'통화는 간단히'
이것처럼 무서운 게 없다. 앞으로는 이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수다는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