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린 Feb 07. 2023

나갑니다

워킹맘 가슴속 사직서

13년 차 직장인입니다. 가슴속 사직서는 항시 대기 중입니다.


12년이 넘게 한 직장이 다니며 3-4년 차 정도부터 사직서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큰 회사라면 큰 회사고, 외국계 회사이기도 해서 대체로 크게 힘든 건 없었다.


입사 때부터 문제는 같다. 회사의 비전과 나의 커리어 발전 가능성, 그리고 돈.


돈은 사원 때는 아니었지만 반짝 업계에서 남부럽지 않게 받은 시절도 있었다. 출산하던 해부터 시작된 연봉 동결은 5년째 유지 중이고, 동시에 활발한 손자 육아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엄마의 얼굴을 보는 괴로움, 하루 3시간이 넘는 통근의 피로가 누적되어 갈수록 물음표는 계속 커졌다.


난 뭘 위해 살고 있나? 나의 목표는 무엇인가. 내가 이 정도 벌자고 이 고생의 통근길을 언제까지 감내해야 하나.


집을 구매할 때 며느리의 명의를 넣지 않는 것에 대해시아버지는 결국 모두 나의 아들의 것이니 마음 쓰지 말라 하셨다. 아들을 위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 있지만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이룬 것은 내 것이고, 응당 내 소유가 되었다가 넘어가도 넘어가야 했다. 부모님은 내가 쓸데없이 예민하다 했지만 나의 돈벌이 여정이 부정당한 느낌의 상처로 남았다. 세상에 쉽게 버는 돈이 있을까. 신혼 때 보탠 일억이 미혼 시절의 자부심 중 하나였다.


돈이 없으면 비참하겠지만 나에게 돈은 가족 이상이 될 순 없었다. 육아 휴직 후 복귀했을 때는 벼락거지 시절이라 내가 돈을 벌지 않으면 내 아들이 가난하게 살 것 같아서 무서웠다. 내 벌이는 남편보다 나았고, 이미 평생 나는 우리 부모님보다 가난하게 살 것이 자명해 보였다. 알코올중독을 겪고, 항우울제를 복용하면서도 퇴직할 수 없는 이유였다. 버티다 보면 지나가리라 되뇌었고, 결국 버텨냈다.


그 시기를 버텨내자 이제 노쇠하고 지친 엄마의 얼굴이 내 발길을 잡는다. 남편보다 먼저 새벽에 나가는 난 아침에 엄마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새벽마다 엄마의 얼굴을 마주쳤으면 불효자식의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진작에 때려치웠을 수도 있다. 언제까지 돈 때문에 64세 엄마의 인생을 담보로 잡을 것인가.


새카만 겨울 새벽 긴 골목길에 드리워지는 내 그림자를 보면 이 시간에 청담역에 출근하러 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구나 한없이 쓸쓸해졌다. 돈 외에 이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고, 이대로 버티다 보면 완전히 어두워져 한 치 앞의 길조차 보이지 않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몇 가지 기준을 가지고 오래 고민했다.


- 아이의 등하교 시간을 책임질 수 있을 것

- 무슨 일이 생겨도 나와 아이의 생활을 감당할 경제적 능력이 있을 것

- 내 노후는 내가 해결할 것


드디어 인생의 플랜 B가 생겼다. 남은 것은 계획대로 내년 이사 전에 퇴직하기 위해 최대한 수입이 생길 정도로 노력하는 것만 남았다.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뛴다.

작가의 이전글 별나라에서 온 그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