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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Jan 19. 2023

크리스마스이브와 대상포진

잠들 수 없는 긴긴밤

그림자처럼 내 인생을 따라오는 잊을 수 없는 하룻밤이 있다.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어두운 겨울밤 시린 눈발이 한가득 휘몰아치는 먹먹함이 까맣게 차오른다. 눈 감지 않아도 악몽처럼 따라오는 이 고통의 기억을 너는 짐작이나 할까.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해의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막 돌이 지난 아이는 생애 처음으로 39도가 넘을 정도로 열이 났고, 나는 추운 방에서 아이 옆에 꼭 붙어 응급실에 가는 일만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밤을 지새웠다. 깜빡깜빡 잠이 드는 둥 마는 둥하는 긴긴밤, 골반 근처에서 대상포진이 보내는 찌릿한 신경통이 내내 존재감을 과시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고통이었다.


눈가의 눈물이 너무나 뜨겁게 느껴지는 가장 무섭고, 가장 외로운 밤이었다.


그날 이후로 내 안의 무언가가 크게 변했다.


아픈 아이와 힘든 내 곁에 있어 주지 않았던 남편에 대한 크나큰 배신감과 상처로 가장 필요한 순간에 저 사람은 우리 옆에 없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은 조용히 스며들었다.


다른 기억과 달리 그날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렬해졌고, 내 결혼 생활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있는 줄도 몰랐던 상처는 작은 자극에도 점점 커졌고, 남편이 없는 게 낫다고 혼자 되뇌는 순간이 쌓여갈수록 미움 대신 관계의 무상함에서 오는 체념으로 채워졌다.


아이를 낳은 이후로 완전히 달라진 생활에서 오는 고독감과 나만 힘들다는 억울함은 끝도 없이 쌓여갔다. 육아란 끊임없이 내 바닥을 확인하는 과정이었고, 평생 볼 일 없던 내 바닥은 끝도 없이 깊었다. 폭발하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며 그 이후로도 거의 3년이란 시간 동안 알코올중독과 우울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내가 겨우 이런 사람이었다니. 이거밖에 안 된다니.

이제 나는 안다. 생각보다 내 정신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고, 어려운 시기가 찾아오면 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문득 서랍이 열리고 그날의 기억이 찾아오면 이제는 조용히 상처를 보듬으려고 노력해 본다. 일단 헤어지지 않고 같이 살아가기 위해, 아이를 위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아주 조금씩 나아지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서랍이 열리지 않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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